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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양승미(2025.01.09)

클리오56 2025. 1. 9. 20:50

다음 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중인 전시회 관람을 예약해두었다.

타이틀은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부제는 쿠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하여 사전 스타디 차원에서 관련 동영상을 보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양승미 학예사의 체계적이고 세밀한 설명 덕분으로 이해도를 상승시켰다.

아래는 수차례 반복 시청하면서 정리했다. 유튜브에 스크립트 기능이 있어 정리에 한결 편했다.

나같은 미술 초심자에게는 이 정리가 도움이 될듯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세기 전환기에 비엔나를 무대로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특히 20년이라는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 보수적이었던 비엔나를
도전과 혁신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일까?

이 포스터는 1918년 비엔나 분리파의 49회 전시회를 위해서 그린 포스터인데 바로 에곤 실레가 그렸다.

테이블의 제일 위에는 에곤 실레가 자리했다. 그는 이 전시회로 굉장히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이 자리에 제일 맞은 편에 어떤 빈자리가 그려져 있다.

사실 이 빈자리는 우리도 잘 아는 구스타프 클림트 화가의 자리였다. 

그는 왜 클림트의 자리를 비워 놨을까? 그리고 왜 이 둘의 관계가 특별한지?

그리고 왜 이번 전시의 부제가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인지?

 

비엔나 1900년대가 어떤 공간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우선 19세기 말은 산업화의 영향으로 사회가 정말 격변의 시기를 맞았다.

또한 그동안 신, 종교, 역사를 주로 그리던 예술의 주제가 예술 그 자체에 집중하는 관점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면 왜 비엔나를 봐야하는가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요세프 1세 황제의 업적 중에 하나가 비엔나를 대도시로 확장하는 것이었는데

도시를 확장하고 20개가 넘는 건축물을 지으면서 이 정책은 거의 30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필요한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두 비엔나로 모여들었다.

19세기 말에 비엔나는 이미 모든 예술가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던 핫플레이스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비엔나 1900년대라는 이 단어 자체가 특정 사조를 의미하기 때문에 또 중요하고

이 시대 예술가의 구심점이 되었던 구스타프 클림트 화가를 집중적으로 처음에 조명을 한다.

 이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시기에 새로 지어졌던 국립 극장에 벽화를 작업하면서 그린 습작이다.

실제 벽화는 거의 12m 달하는데, 이번에 전시된 이 작품은 디오니소스 제단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가운데 디오니소스 흉상이 그려져 있고, 그 양쪽에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두 여자가 그려져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이 벽화 작업으로 황제상을 받을만큼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만 해도 구스타프 클림트는 굉장히 전통적인 화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 이후에는 회화에서 점점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 

 

 

클림트는 구도나 눈빛의 방향, 이런 표정들을 표현하는 방식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왼쪽은 트라운 백작이라는 작품명을 달고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사망할 때까지 클림트가 보유하고 있었는데

즉, 누군가의 주문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구스타프 클림트는 인물화에서도 많은 시도를 하지만 또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사조의 영향도 받는다. 

 

클림트의 '수풀속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확연한 인상주의 영향을 보실 수 있다.

19세기 말에 유럽을 중심으로 굉장히 유행했던 이런 인상주의 화풍과 함께 이 여인의 눈은

클림트가 여인을 그린 초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클림트의 눈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작품이라서 굉장히 특별하다.

 

클림트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하자는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면서 비엔나 분리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위의 문구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비엔나 분리파는 1897년에 창립이 되었고, 클림트와 뜻을 함께했던 많은 예술가들이 창립 회원이 되었다.

이들은 과거에서부터 벗어나 전통으로부터 단절하여 새로운 예술을 해보자는 그런 의지를 가졌으며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분리라는 것도 바로 과거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분리파는 원래 뮨헨에서 시작했고, 베를린으로도 이어졌지만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 운동의 움직임이 가장 컸고 혁신적이었다.

그래서 지금도이 1900년대 비엔나 분리파는 이런 특정 사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 양쪽에는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하면서 만들었던 포스터들이 전시가 되어 있다.

포스터는 거리의 예술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런 포스터를 거리에 건다는 거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 또 우리가 앞으로 할 것들을 홍보하기 위한 그런 역할을 한다.

 

비엔나 분리파는 특정 양식을 고집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보자, 이런 다원주의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누가 포스터를 그리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양식의 포스터가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보면 글씨의 모양이 굉장히 특이하다. 이렇게 왜곡된 서체를 그리면서

SECESSION(분리)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길쭉하게 되어 있다.

아래를 보면 정말 이상하게 굵게 쓰여지고 자간이 너무 좁은 이런 서체로 자신들의 전시를 홍보했다.

가독성은 매우 떨어지지만 너무 특이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잡아 끌었을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포스터의 역할이자 거리 예술의 핵심이기도 했다.

 

위는 1902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위해서 만든 포스터이다. 이 전시회의 주제는 베토벤에 대한 경의였다.

베토벤은 고전파 3인방이라 불리는 작곡가이지만 낭만파의 문을 열었다.

고전파는 굉장히 엄격한 형식을 지켜야 했던 음악적인 형식이었는데

베토벤은 그 형식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감정을 담은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냈다.

그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해보겠다는 비엔나 분리파의 이상과 또 서로 공통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래서 비엔나 분리파는 베토벤을 굉장히 존경했고 그를 기리기 위한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가 중요한 것은 비엔나 분리파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총체 예술을 구현한 전시이기 때문이다.

총체예술은 쉽게는 오페라를 생각하면 된다. 오페라에서는 시에 기반에서 노래를 하고, 연기를 하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그리고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하고 이런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졌을 

관람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선사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총체 예술의 핵심이다.

클림트는 바로 이 개념을 전시회에 가져와서 적용을 했다.

 

 이 개념을 더 이해하기 쉽도록 영상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 공간에서는 베토벤 전시회와 이 총체 예술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 줄 수 있게 전시회측에서 3면 영상으로 제작을 했다.

이 베토벤 전시회에서 독일의 표현주의자 막스 클린거는 베토벤 조각상을 조각을 해서 중앙 전시실에 전시를 했고

또 많은 비엔나 분리파의 회원들이 베토벤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그런 작품들을 전시를 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작품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3면 벽화인데, 이 영상이 3면으로 이루어졌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내용을 미술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클림트가 인간의 어떤 투쟁, 고통, 그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그런 과정들을 벽화로 풀어낸 것이다.

이것은 현재 빈 분리파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어 실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상으로 제작했다.

이 영상에서 이런 조각 그리고 음악, 회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총체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비엔나 분리파는 잡지도 발간하였다. 잡지는 내가 생각하는 어떤 사상에 대해서 설파하고

그리고 다른 곳에서 유행하는 그런 정보들을 입수해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이 비엔나 분리파가 발간했던 잡지를 성스러운 봄이라고 하는데, 그 창간호의 모습부터 먼저 보겠다.

제일 왼쪽에 있는 이 잡지 디자인이 바로 제일 먼저 만들어진 성스러운 봄의 창간호이다.

나무가 하나 있고, 나무의 세 개의 문장이 빈 문장이 되게 열매처럼 매달려 있다.

이게 바로 회화, 조각, 건축이라는 예술의 기본적인 요소를 상징하고

그 아래로 보면 이 나무의 화분을 뚫고 뿌리가 나와 있다. 이렇게 비엔나 분리파는

자신들의 예술적인 사상이 비엔나에 뿌리를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창간호를 디자인 했다. 

또 이 잡지의 이름이 성스러운 봄인 것 역시

과거에서부터 벗어나 새로운 예술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라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이 잡지가 아주 특별한 것은 이 잡지에 있는 그림들이 구스타프 클림트가

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위해 디자인했던 포스터의 이미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영웅인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찔러 죽이고 있다.

여기서 테세우스는 새롭게 나타난 젊은 전사들 비엔나 분리파 의미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미노타우르스는 과거의 구습과 같은 것을 상징한다.

 처음에 이 포스터가 그려졌을 때 테세우스의 몸이 전부 나체로 그려졌는데,

이게 검열에 걸려서 클림트가 중요한 부분에 나무 줄기를 그려 넣어야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성스러운 봄은 비엔나 분리파 사상과 앞으로 하고 싶은 어떤 예술적인 방향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 반경이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포스터, 잡지의 표지 디자인, 다양한 그래픽 디자인으로 예술의 반경을 점점 넓혀 나갔다는 것에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발간한 전시도록의 표지를 장식한 작품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큰 포플러 나무이다.

이 작품에서 화면의 90%를 하늘이 가득 채우고 있고, 굉장히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이 구름들이 서로 휘몰아치는 듯한 굉장히 격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포플러 나무를 보면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이런 색깔의 점들이 굉장히 장식적으로 찍혀 있다.

클림트는 19세기 말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나 상징주의

그리고 장식 미술에서 출발한 아르누보와 같은 경향성을 예술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예술을 해야 되는데 과연 이 새로운 예술을 어디서 찾을 것이냐라고 했을 때

오스트리아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밖에서 어떤 예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주시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나가기를 바랬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전시된 다른 풍경화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이 분리파의 회원들이 새롭게 그린 오스트리아의 풍경화를 볼 수 있는데 하나를 소개한다.

이 작품은 카를 몰이라는 화가가 그린 쇤브룬 정원을 그린 것이다. 

이것 역시 인상주의의 영향과 신인상주의의 점묘법, 즉 점을 찍어서 이런 색을 표현하는 부드러운 화풍을 잘 보여준다.

카를 몰은 이런 풍경화나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실내 장면을 그린 것에 굉장히 능했던 화가이다.

그리고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회원 중의 하나였다. 

 

이제 갑자기 어떤 의자가 나타났고, 그리고 이 뒤의 배경으로 짐작하건데 여기가 카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지금도 비엔나에 있는 카페 뮤지엄이 1899년 처음으로 개업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의자 중에서 오른쪽에 있는 의자가 이 당시 카페가 개업했을 때 실제로 만들어졌던 아돌프 로스의 의자이다.

 

19세기 말에 비엔나에서는 카페 문화가 굉장히 발달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전부 카페에 모여서

새로운 시대의 예술에 대한 담론,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또 후원자들과 연결을 하는 그런 중요한 역할도 했다.

특히 후원자들이 없었다면 이 비엔나에서 시작된 이런 예술 운동이 모더니즘으로 이끌어지는 데까지

큰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이런 후원자들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후원자들과 예술가들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이 두 개의 작품은 여성화가 브론치아 콜러피넬이 그린 것인데 왼쪽은 딸 실비아 콜러이다.

브론치아 콜러 피넬은 굉장히 인맥이 넓은 사람이었고, 클림트와도 절친했고

그리고 이후 새로 나타난 젊은 예술가들의 표현주의적인 경향도 지지하면서 후원해 주는 역할을 했다.

 

여기 쭉 있는 드로잉들이 전부 후원자를 그린 작품들이다. 특히 왼쪽은 에곤 실레가 그린 후원자의 드로잉이다.

두번째는 프란츠 하우저라는 사람의 드로잉이다. 프란츠 하우저는 원래 굉장히 가난했지만 호텔과 식당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막대한 부를 획득했고 이 돈으로 전부 예술품을 수집을 했던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수집한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지금도 비엔나 1900년대에서

놓치면 아쉬운 굉장히 중요한 컬렉션이다.

 

이 세 개의 드로잉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렸으며, 세 사람 모두 비엔나 문화에서 중요한 인사들이다.

특히 마지막 작품은 카페 의자로 소개된 아돌프 로스이며 장식은 범죄라는 책도 발간을 했다.

그래서 장식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간결한 기능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기능적인 디자인이 앞으로 이 비엔나 디자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작가들이 보여준 표현주의적인 경향성을 굉장히 지지를 해줬다. 

 

이 시기에 나타났던 또 다른 회화적인 경향성을 살펴보는데, 바로 콜로만 모저라는 예술가이다.

이번 전시에서 여섯 명의 대표적인 예술가를 꼽아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구스타프 클림트이고, 두 번째가 바로 이 콜로만 모저이다. 

콜로만 모저 이름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처음에는 디자인으로 두각을 드러내다가

또 디자인 공방의 설립 주축이 되면서 공예품을 디자인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 이후에는 회화로 전향해서 회화로 많은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정말 다재 다능한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특별하게 소개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풍경화이다.

 

 

19세기 말에는 자포니즘이라고 해서 일본 미술, 특히 일본 목판화의 영향이 유럽에서 크게 유행을 했다.

그래서 콜로만 모저는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특히 일본 미술 200점을 모아서

6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열었을 정도로 일본 미술의 영향력을 비엔나에 소개하는 그런 역할도 했다.

이 풍경화도 그런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소개를 하고 있다.

 

사실 이번 전시에서 이렇게 밝고 화사한 작품을 찾아보기가 좀 어려운데

콜로마 모저의 작품이 대표적으로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인상주의가 탐구했던 그런 빛과 색의 탐구를 계속해 나갔던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아름다운 색감의 꽃 그림을 남기기도 했고,

회화에 있어서도 호기심 많게 여러 가지를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예술가는 알빈 에거 리엔츠 화가이다. 

먼저 비엔나 분리파의 대해서 한 가지를 더 설명을 드린다면, 비엔나 분리파가 처음 만들어질 때

클림트를 주축으로 했던 클림트 그룹과 함께 이 비엔나 분리파 형성했던 또 다른 단체가 있다. 

그게 바로 하겐 클럽인데 이 클럽은 자연주의 풍경화를 주로 그리면서

어떤 회화나 드로잉과 같은 순수 미술에 굉장히 집중했던 단체였고

이들 중에서도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예술가들이 비엔나 분리파와 함께 활동을 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알빈 에거 리엔츠이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는 단체였고

때문에 이들이 점점 발전해 나간 방식은 어떤 사실주의적인 표현주의로서 나타났다.

그의 작품들은 오스트리아 소시민의 삶이나 노동자들, 그리고 풍경화들을 굉장히 따뜻한 정서로 담아냈다.

이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도 이 지역의 어떤 풍습을 보여 주는 것이고,

뒤의 색색가지 유리공들이 굉장히 예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소녀의 축과 함께 이것 역시 십자가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 당시에 어떤 종교적인 행사에서 보여주는 풍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또 해석을 할 수 있다.

 또 이런 노동자의 모습이나 자신의 고향을 그린 풍경화, 그리고 이렇게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굉장히 따뜻한 정서로 담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2부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경향성을 보여줬던 그런 비엔나 분리파의 그 작품들을 살펴봤다.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기 전에 특별한 영상을 하나 소개한다.

이번 전시를 대표하는 여섯 명의 예술가들을 소개한다고 했는데 클림트를 제외하면 너무 생소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영상을 통해서 여섯 명의 예술가들의 대표작들을 소개한다.

이 영상을 보고가면 앞으로 만날 예술가들을 보다 친숙하게 대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3부로 이동한다. 여기에 들어오면 공방에 들어온 느낌이 난다. 

비엔나 분리파는 1903년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공방을 만들었던 이유는 이 비엔나 분리파는 예술의 장르를 점점 허물어 나가면서

일상 속의 모든 물건들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런 철학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즉 이렇게 일상에서 사용되던 다양한 용품들이 공예품으로 제작이 되었다.

이 다섯 개의 작품들은 모두 꽃병인데 굉장히 아름다운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엔나 분리파는 금속 공방이나 가죽 공방과 같은 곳은 자체적으로도 운영을 했지만

이런 유리 화병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유리 제작소와 협업해 제작을 하기도 했다.

즉 디자인 공방에서는 디자인을 하고, 전문적인 제작소에서 제작을 하고,

또 그것을 판매하는 회사가 함께 협업을 해서 일종의 유통 구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양식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런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대표적인 꽃병들이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이 공간에는 유리잔, 와인잔, 가죽 제품들 이런 다양한 공예품들이 전시되었다. 

 

여기 왼쪽에 있던 의자는 오토 바그너가 만들었는데 그는 건축계 대부와 같은 존재였다.

아돌프 로스보다 20살 이상이나 많았으니 완전 선배와 같은 사람이었다.

오토 바그너는 장식적인 것과 기능적인 것을 결합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니,

즉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이 둘의 굉장히 다른 생각은 또 디자인적인 철학이 점점 변화되는 그런 관념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아까 말씀드렸던 콜로만 모저도 오토 바그너의 제자이고,

꽃장식 테이블을 만든 요제프 호프만 역시 오토 바그너의 제자이다. 

요제프 호프만은 특히 디자인 또는 건축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예술가인데

처음에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영향을 받은 장식 미술에 기반한 그런 공예품들도 만들었지만

지금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무늬가 바로 정사각형이듯,

그의 별명은 정사각 호프만이었을 정도로 정사각형에 열광했던 사람이다. 

 

처음에는 장식적인 그런 디자인도 선보였지만 1900년대 영국의 예술공예 운동을 접하면서

찰스 레니 매킨토시와 같은 예술가들과 협업을 하고 난 다음에 이런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요제프 호프만은 8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국제 공예를 주제로 기획을 하면서

찰스 레니 맥킨토시를 비엔나로 초대해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매킨토시가 비엔나 분리파의 회원으로 등록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요제프 호프만의 정사각형은 이 공간에서도 많이 만나 볼 수 있다.

 

또 하나 굉장히 중요한 것은 바로 디자인 공방이 보여준 총체 예술인데

이렇게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고 이 뒤에 보이는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저희가 디자인한 이 무늬들은

전부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이 디자인한 벽지 디자인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런 요소들과 이 공방을 보여 주는 곳에 바닥에 있는 그런 기하학적인 무늬까지 저희는 이 공간을

정말 총체 예술로서 의미가 있는 실내 디자인의 종합적인 모습으로 보여 드리고자 이렇게 디자인했다.  

 

이제 1, 2, 3부까지 여러분들은 비엔나 분리파의 특징에 대한 것, 이들이 만들었던 디자인 공방,

그리고 이들이 구현했던 총체 예술 이렇게 보셨다.

바로 이 3부까지 클림트를 대표로 하는 앞선 세대 이야기들을 들려 드렸다.

 

 이제는 클림트 세대들이 만든 토대 위에서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나타났던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경향성을 만나보러 4부로 이동한다. 

젊은 예술가들을 대표하는 사람은 바로 에곤 실레이다. 클림트가 주축이 되어 비엔나 분리파를 만들었고

에곤 실레는 또 동료 학생들을 모아서 신 예술가 그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역시 보수적인 아카데미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였는데 이 두 단체는 이념과 사상이 굉장히 비슷하다.

에곤 실레는 아카데미 학생이었는데 정말 아카데미의 그런 보수적인 교육법이 너무나 싫증이 났던 차에

1907년 클림트를 만났고, 이 클림트는 그 당시에 너무나 성공한 대가의 반열에 올라있던 예술가였다.

 

에곤 실레는 자기 작품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보여 줬다고 하는데

클림트가 그걸 보자마자 이 젊은 예술가의 천재성을 바로 꿰뚫어 봤습니다.

그래서 클림트는 에곤 실레를 후원해 주면서 그리고 전시회에도 초대를 하고 또 후원자를 연결해 주기도 하면서

에곤 실레가 정말 앞으로 예술 세계를 계속 개발해 나갈 수 있도록 그런 길을 열어 주었다.

 

이 작품을 보면 배경은 금색과 은색이 굉장히 반짝이는 장식적인 재질로 되어 있고,

그리고 이 앞에 굉장히 과장된 꽃 장식도 클림트가 보여주는 장식 미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클림트를 만나고 변화한 에곤 실레의 화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에곤 실레는 클림트를 만나면서 점점 변화하기 시작을 했고, 신 예술가 그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신 예술가 그룹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들도 이 공간에 같이 전시가 되었는데 바로 이 초상화들이다.

먼저 푸른옷을 입은 소녀를 만나본다. 

이때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경향성을 표현주의라고 부른다.

무엇을 표현한 것이냐면 개인의 감정 또는 성격,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을 색깔과 형태로 표현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인물의 감정을 표현할지를 탐구하면서 많은 인물화를 그렸다.

 

이 푸른 옷을 입은 소녀를 보면 눈가는 굉장히 붉어져있다. 마치 지금이라도 운 것처럼 슬퍼 보이고

또 아래를 보면 이 소녀는 양팔을 잡고서 앉아 있다. 굉장히 불안한 심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녀의 초상화를 마주하고 나면 과연 이 소녀는 지금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까,

또 어떤 상황에 처해 있길래 이런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굉장히 궁금하다.

 

이곳에 전시된 많은 작품들이 신 예술가 그룹이 활동하면서 만들었던 작품들인데,

처음에 이 표현주의적인 경향성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굉장히 비판의 대상이 됐다.

오히려 내 눈을 고문하는 고문실 같다라는 표현까지 써 가면서 이 새로운 경향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 예술가 그룹은 3년 정도 활동하면서 세 번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면서 혹평은 받았지만 이제 비엔나 예술계는 표현주의 시대라는 그런 세대 교체를 알리기도 했다.

 

4부에서는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만나보는데 그중 제일 먼저 오스카 코코슈카이다.

오스카 코코슈카 역시 아카데미 학생으로 출발을 했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도 보면 굉장히 사실적인 그런 누드 소녀를 그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아카데믹한 화풍을 보여줬던 그가 불과 몇 년 후에 큰 변화를 보이는 작품을 그렸다.

 

코코슈카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전시회의 포스터를 그렸다.

이것은 1908년에 열렸던 비엔나 예술 전람회 포스터인데, 목화솜 따는 소녀라는 부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면 굉장히 단순화된 인물과 어떤 생명의 활용 이런 것들이 이전과는 굉장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클림트가 보여주는 어떤 장식적인 그런 모습과 굉장히 단순화된 이런 색면들이 또 특별한 그런 특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랬던 오스카 코코슈카가 정말 파격적이고 파괴적인 그런 표현주의로 점점 이행해 나간다.

특히 이 작품은 1909년 비엔나 국제예술 전람회에서 그가 직접 대본을 써서 공연을 했던 살인자라는 공연의 포스터이다.

포스터를 보면 여인이 어떤 붉은색 존재를 막 위에서 깔아뭉개고 있는데 이것은 피에타 도상을 가져온 것이다.

피에타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데,

이 모습은 정말 모티브만 따왔을 뿐 굉장히 파격적인 걸 보여주고 있다.

연극의 주제는 남성과 여성의 투쟁이다. 과연 이들은 왜 싸우는가, 그것을 파헤치는 연극이었는데

이 표현주의 연극으로서 당시에 큰 혹평을 받았다.

특히 그는 문제아, 또는 야수 중의 야수다, 세상에서 가장 거칠다는 그런 파격적인 별명까지 얻어가면서 혹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가 2년 후에 강연을 했던 강연회의 포스터이다.

여기 중앙의 인물을 보면 뭐 굉장히 힘들어하는 것 같은 모습인데, 이게 바로 그의 자화상이다.

코코슈카는 이 강연에서 얼굴에도 영혼을 담아낼 수 있다라는 그런 내용으로 강연을 했는데,

당시에도 이런 이론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도대체 얼굴에 어떻게 영혼을 담아내는냐는 그런 논란이 오히려 불거졌는데

그는 포스터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리면서 마치 비탄에 빠진 예수와 같은 것을 상징적으로 은유해 자신을 보여줬다.

즉 대중의 혹평에 굉장히 상처받고 또 소외감을 가진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코코슈카가 그렸던 초상화들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만난다. 

이 작품은 헤르만 슈바르츠 발트 초상화인데 당시 당시 비엔나 문화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사였다.

이 작품을 보면 배경의 색과 옷의 색을 거의 비슷하게 하고 오로지 얼굴과 손에 관람객의 시선이 집중되게 그렸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주름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렸는데, 그런데 전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고

이 헤르만 슈바르츠 발트의 감정이나 성격과 같은 것을 오스카 코코슈카만의 방법으로 이렇게 표현적으로 그렸다.

특히 손의 모양을 보면 굉장히 울퉁불퉁하게 또 왜곡돼 있는 그런 손의 표현을 볼 수가 있다.

손이라는 것은 예술가에게 굉장히 중요한 표현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또 중요한 인체의 그런 부분 중에 하나이고 

그래서 이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손을 굉장히 강조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오스카 코코슈카와 굉장히 비슷한 화풍을 보여줬던 다른 작품을 만나본다.

 

이 작품은 막스 오펜하이머라는 당시 비엔나 표현주의 예술가의 자화상이다.

막스 오펜하이머는 코코슈카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고 하는데

둘의 화풍이 굉장히 비슷해서 또 학교에서는 가까이는 앉지도 말라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 막스 오펜하이머의 초상화 역시 배경과 옷의 색을 거의 비슷하게 하고

또 이 막스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이것이 어딘가를 노려보는 것도 같지만 또 굉장히 연약한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아래 손을 보면 어딘가 막 일그러진 것 같은 앙상한 손 역시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담은 그런 손을 표현한 것이다.

막스 오펜하이머는 에곤 실레와 굉장히 절친하여 같은 스튜디오를 공유하면서

같이 활동하기도 하면서 서로간에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도 한다.

 

다음으로 리하르트 게르스틀이라는 표현주의자를 만난다.

그의 풍경화와 초상화들이 전시가 된 단독 공간이다.

이 화가는 사실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자기가 그린 작품을 거의 공개하지 않았고, 화가들과 교류도 없었다.

그는 음악가와 철학가들과는교류를 많이 했는데, 25살에 굉장히 짧은 생을 마감했고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거나 훼손하여 많은 작품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동생에 의해서 1930년대에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정말 희소 가치가 높은 그런 특징을 보여준다.

 

두 여인의 초상화를 살펴본다. 두 여인 모두 피아니스트인데 특히 이 여인은 게르스틀이 교류했던

아르놀트 센 베르크 서클에 있었던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 스마 아그다 베르크의 초상화이다.

이 여인의 얼굴도 사실적으로 묘사했지만 이 주변을 보면 이런 색점들을 찍어서 굉장히 특별한 효과를 낸다.

이때만 해도 인상주의 그중에서도 점묘법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게르스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굉장히 크기가 큰 작품인데 색조도 부드럽고 여성을 굉장히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인상주의적인 화풍은 곧 변화를 하게된다. 

 

이 초상화는 불과 1~ 2년 후에 그려진 초상화인데

이 헬리카 콘이라는 피아니스트를 굉장히 감정적으로 또는 이 여인의 영혼을 담아 그렸다는 것을 좀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녀의 표정을 보면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감이 가득하며

이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이 파란색 이런 덧칠이 그녀의 후광 또는 어떤 영혼의 빛 아우라를 느끼게한다.

그리고 이렇게 시스루로 표현한 그녀의 의상들 역시 전체적으로 이 여성의 성격 또는

그 여인의 감정, 피아니스트로서의 어떤 자신감이나 정체성을 느낄 수 있게 표현이 되었다.

 

즉 아까 본 후기인상주의, 신인상주의에서 표현주의로 점점 변화하고 있는 게르스틀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는 출품되지 못했지만 게르스틀의 후기작을 보면 추상화에 가까운 파격적인 표현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연도가 1908년인데, 그 해에 게르스틀이 사망했다.

그리고 에곤 실레가 신 예술가 그룹을 만든 것이 1909년인데,

그렇기 때문에 거의 10년이나 빠르게 이 게르스틀은 표현주의를 굉장히 완성도 있게 구현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즉 게르스틀은 시대를 앞선 표현주의의 선구자 같은 것이다.

 

비교적 초기의 게르스틀 자화상이다. 처음에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이 작품이 주는 어떤 아우라나 감동 때문에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이 작품을 감상하였다.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거의 얼굴 부분에 모든 에너지가 다 모여 있다는 것이다.

게르스틀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를 넘어 자기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것같은 깊은 눈매를 보여준다.

이런 후광과 같은 효과가 게르스틀 자신을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그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에곤 셀레로 넘어간다. 많이 보았을 이 작품은 포스터로도 많이 나왔다.   

이 작품의 실제 사이즈는 포스터만큼 크지 않지만 이 작품이 주는 느낌이 굉장히 강렬하기 때문에 직접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에곤 실레의 표정은 아래를 살짝 내려다본다.

이 작품이 그려진 1912년은 에곤 실레가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친 끝에 자기만의 화풍,

자기만의 어떤 양식을 만들어 나간 그런 시기이다. 그래서 그런 자신감에 가득차 있는 것도 같지만

 

또 어딘가를 내려다보는 그 모습에서 자신 안에 유약하고 또 예민한 어떤 성격들이 함께 보여지기도 한다.

특히 왼쪽에 꽈리 열매의 붉은색과 에곤 실레 입술, 그리고 눈동자에 그려진 그런 붉은색이 좌우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실레 머리의 검은색과 옷의 검은색이 또 아래 위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어 이 작품은 조화가 완벽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에곤 실레가 보여주는 그런 연약한 어떤 선의 움직임과 같은 것들이 굉장히 잘 보여지기 때문에

이 작품을 에곤 실레의 특징을 굉장히 집약해서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에곤 실레라는 사람은 정말 철학적으로 예술에 접근했던 사람이다.

특히 인간이라는 것이 느낄, 인간이 느꼈을 다양한 감정들을

예술로 어떻게 보여줄지를 많이 고민한 인간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접근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에곤 실레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자.

에곤 실레는 1906년 아카데미에 입학을 했고, 이 드로잉은 재학 시절에 그렸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에곤 실레는 드로잉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두 살 때부터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미술적으로 기본적으로 정말 그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클림트를 만나고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그린 자화상을 보면 또 정말 다른 느낌이 든다.

좀 전에 봤던 그런 아카데믹 한 것과 전혀 다르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한쪽에서 빛이 비추면서 얼굴을 거의 반으로 나눠서 빛과 그림자 명함의 대조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실례가 느끼고 있을 어떤 어두운 감정들이 무엇인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이런 자화상을 그렸다.

 에곤 실레는 이렇게 어떻게 자신을 표현할지를 많이 고민하면서 자화상도 많이 그렸던 예술가인데

이제 에곤 실레가 보여주는 이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주제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이 작품은 스스로를 보는 눈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가운데 있는 남자는 사실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굉장히 에곤 실레를 닮았다. 즉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다.

가운데에서 눈을 감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하얀색 존재가 뒤에서 이 에곤 실레를 감싸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죽음 또는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극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를 보면 어떤 손이 굉장히 큰 손이 아래에서부터 뻗어 올라와 있는데

이 손은 사실 에곤 실레도 뒤의 유령에서 나온 손도 아닌 새로운 손이다.

손이라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매개체였다.

 

이런 정체성의 위기라는 주제를 탐구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 굉장히 급변하면서 혼란했던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들이 주로 다루던 주제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의 위기를 정말 에곤 실레만의 방식으로 보여 준 것,

그리고 이렇게 특별하게 손을 사용해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낸 방식, 역시 에곤 실레 자신이 생각하던 어떤 철학적인 주제들을

어떻게 특별하게 예술로 표현해 냈는지를 볼 수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에곤 실레의 특징을 살펴본다. 그는 자화상을 몇백점 이상 그렸지만 드로잉을 4천점 넘게 남겼다.

특히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끊임없이 스케치를 했다.

이 작품 역시 뒷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그렸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는 이렇게 어떤 구도에서, 또 어떤 자세에서, 어떤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이렇게 드로잉을 연습하면서 끊임없이 발굴을 했고,

이 드로잉에서도 아래쪽의 손을 보면 손이 굉장히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손이라는 것이 에곤 실레에게 정말 중요한 매개체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

 

 에곤 실레는 어머니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14살 때 굉장히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일찍 가장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실레가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서 정착하기를 바랬지만

그는 너무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서 갈등이 많았다.

어머니와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지 못한 유년기를 보낸 에곤 실레는 어머니와 아이를 주제로 하는 많은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으며, 그리고 상의 안에 어머니와 아이의 얼굴이 합쳐져 있는 것을 보실 수 있다.

이것는 기본적으로 어머니와 아이간에 가지는 유대감을 보여 주는데

이 아이의 표정과 손짓은 당장이라도 품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습이다.

즉 이렇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에곤 실레의 작품들은

정말 그가 어머니로부터 느꼈을 그런 감정들을 투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쪽에 물감들을 막 아무렇게나 그린 것 같은 이런 자국들은 실제로는 에곤 실레가 손가락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 에곤 실레 지문이 남아 있다고 하니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어머니와 아이도 만나보자. 이 작품은 굉장히 크기가 큰데,

레오폴트 미술관에서도 정말 한 벽면의 메인으로 전시가 되어 있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도 어머니와 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려져 있고,

피에타라는 그런 삼각형의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티프를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굉장히 에곤 실레다운 방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어머니의 표정도 해골이고, 안겨있는 아이 역시 거의 창백해 죽어있는 표정이다.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과 배경이 또 거의 색이 비슷해서 이 어머니의 얼굴이 그냥 허공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라

사실은 이 두 아이를 전혀 지탱하고 있는 힘이 없어 보인다.

아래에 있는 남자아이 역시 의 죽어 있는 표정이고, 옆에 서있는 어떻게 서있는지 잘 모르겠는 이 아이는

색색가지 줄무늬 옷을 입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어머니와 다른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또 이것은 어머니와 거의 부서진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에곤 실레가 느꼈을 법한 절망감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이 공간은 에곤 실레의 풍경화를 보여주는 굉장히 특별한 공간이다. 특히 이 작품을 먼저 소개한다.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이게 풍경화라고 거의 믿어지지가 않았다.

막 봤을 때는 정말 추상화 같은 모습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이렇게 위에 떠 있는 나뭇가지들이 있고,

더 자세히 보면 이 나뭇가지들이 사실은 나무 줄기가 있다.

그런데 이 나무 줄기가 배경과 같은 색으로 그려져 있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그냥 나뭇가지가 바람속에 휘몰아치고 있는 듯한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에곤 실레는 이렇게 풍경이나 자연 속에 인간의 감정을 담아서 의인화해서 표현했다.

2부에서 다른 유럽의 미술 영향을 받아서 새롭게 오스트리아 풍경화를 그린 예술가들을 소개했는데

에곤 실레는 그것보다도 한 차원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만의 감정을 담은 그런 풍경화 장르를 만들어낸 예술가이다.

 

특히 풍경화 중에서도 특징적인 것이 바로 이렇게 검은 색조로 그려진 도시 풍경화들이다.

검은 색은 에곤 실레의 어떤 외로움 또는 고독감을 보여 주는 것인데,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만큼 창의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안타깝게 여긴다고 편지에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 검은 색조의 도시 풍경화들을 그렸는데, 이 지역은 크루 마우 즉 지금의 체코 체스키 크롬로프이다. 

중세 마을에 굉장히 매력을 느낀 것처럼 이곳의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사실 이 체스키 크룸로프는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자신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어머니의 고향에서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블랙 랜드스케이프라고 부르는 이 검은 풍경화에서 에곤 실레의 감정도 한번 느껴 보시면 좋을 거 같다.

 

이 공간은 누드 드로잉만 구성을 해 본 공간이다.

19세기 말에 에로티시즘에 대한 탐구는 많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발간되면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충동을 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 바로 그 본능이 성욕에 있다라는 것으로서

성욕 자체를 탐구하기 위한 에로티시즘을 탐구하는 그런 예술 작품들이 많이 그려졌다.

그중에서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누드 드로잉을 한번 비교해 보겠다.

 

 

먼저 클림트의 누드 드로잉 세 점은 클림트가 여성을 그릴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클림트는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굉장히 부드러운 선으로 이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또 어떤 얼굴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런 몸의 비율 또 길게 늘어뜨린 몸의 비율과 

이런 아름다운 비례를 생각해서 그린 클림트의 드로잉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에곤 실레의 누드 드로잉은 클림트와 다르게 보다 현실적이고 과감하고 도발적으로 그렸던 예술가이다.

인간에 대해서 가장 솔직하게 접근했던 이런 다양한 구도나 표정 속에서

어떤 인간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지를 많이 연구했던 사람이다.

 

특별히 누드 드로잉 중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드로잉은 바로 이 작품이다.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라는 그런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깡마른 이 여인의 몸이 앞으로 이렇게 숙여지는 어떤 고통, 어떤 외로움, 어떤 고독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에곤 실레는 이렇게 인체의 몸을 연구하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에곤 실레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선에 있는데,

이 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누드 드로잉 방이다.

그래서 이 방에서 에곤 실레의 정수, 즉 이런 선의 느낌을 눈 속에, 마음 속에 잘 담아가면 좋겠다.

 

그럼 이제 마지막 공간인데, 전시를 마무리하면서 영상을 하나 만들었다. 

이번 전시를 49회 비엔나 분리파의 전시 포스터로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바로 에곤 실레가 1918년에 그렸던 다른 원작이 있는데, 그 원작에 보면

제일 높은 곳에 에곤 실레가 자신을 그려 넣었고, 그 맞은 편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아까 포스터에서 봤던 그 빈자리가 바로 클림트의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클림트는 19182월에 사망했고, 3월에 열린 전시회에서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자리를 빈자리로 만들었다.

클림트라는 존재는 이후 세대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클림트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어서 비엔나 분리파를 만들고

많은 예술적인 실험들을 하지 않았다면, 이 젊은 에곤 실레 세대들은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이 클림트의 자리를 빈자리로 만들고 또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클림트를 추모하듯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포스터의 그림을 그린 것은 바로 클림트에게 특별한 마음과 추모의 감정을 담은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의 부제가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례까지인 이유도 이해를 하면 좋겠다. 

또 이 마지막 영상으로 처음에 시작하면서 가졌던 궁금증도 해소를 하셨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해보겠습니다. 예술은 언제나 변화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들을 우리는 선구자라고 부른다.

저희가 지금까지 만나본 비엔나 190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바로 이 비엔나에서 이런 혁신의 움직임을 이끌어낸 선구자들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 새로운 예술을 하겠다,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는 말은 다 좋지만

정말 주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허무 맹랑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평가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시도였다고 평가를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결코 쉽지 않았을 그들의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를 보시면서 이 예술가들의 도전, 실험 그들이 꾸었던 꿈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그것과 함께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어떤 꿈을 꾸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이런 부분들도 함께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