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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2025.1.1)

클리오56 2025. 1. 1. 20:31

내용 및 소감

소설의 원 제목은 엘리자베스 핀치이다. 소설의 여교수 이름인데, 마케팅 전력상이겠지만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내용은 어렵다. 다만, 오래 전에 실존하였던 배교자 율리아누스 로마 황제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현대를 살았던 엘리자베스 핀치를 닐이 이해하는데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굳이 소설의 제목인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를 이에 대입한다면, 이런 해석들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일지, 나는 모르겠다.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올해 최고의 책 하나로 선정하였고, 이를 믿고 나는 이 책을 읽었으며 이동진 유튜브 내용을 일부 옮겼다.  

 
20쪽: 엘리자베스 핀치는 말을 끊고 강의실을 둘러본 뒤 물었다. "이 모든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더니 정적 속에 자신의 답을 던졌다. "나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경찰관을 이용한 자살.'"
우르술라(출처: 위키백과)
성녀 우르술라(라틴어: Ursula, 생년 미상 ~ 383년경)는 4세기에 활동하였다고 전해지는 기독교 순교자로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의 성인이다. 우르술라는 라틴어로 ‘작은 곰’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축일은 10월 21일이다.
 
잉글랜드 왕국의 공주로서 로마로 성지 순례를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훈족에게 피살당했다. 흔히 공주 차림에 종려나무와 화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때로는 넓은 망토를 펼쳐 처녀들을 보호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생애
성녀 우르술라와 그녀를 따른 처녀들에 관한 전설은 10세기에 기록된 성인전에서 유래하는데, 이 성인전은 6세기에 독일 쾰른의 고대 그리스도인들 묘지에서 젊은 여인들의 유골이 발견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발견된 유골과 묘비에는 열한 살 난 여자아이 우르술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묘비에 대한 해석이 와전되어 그녀가 11,000명의 쳐녀들과 함께 순교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황금전설》은 다시 그 이야기를 전하며 최초의 동정녀 순교자들과 성 아우리시오나 아카치오와 같은 성인들의 전설에 나오는 내용을 뒤섞었다.
 
그리하여 우르술라는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어느 잉글랜드 국왕의 딸이었으며 이교도 왕의 아들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3년간 순례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르술라는 11,000명의 처녀들을 이끌고 순례 여행을 떠났는데 그녀와 다른 몇 명의 처녀들이 각각 1000명씩을 맡았다. 순례자 일행들은 로마에 무사히 도착하여 교황의 환대까지 받았으나 돌아오는 길에 쾰른에서 훈족의 포위 공격을 받아 학살되었다. 우르술라는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훈족의 왕 아틸라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으나 자신과 결혼하기를 거부하자 무참하게 화살을 쏘아 살해해 버렸다고 한다.
 
쾰른 시민들은 이들을 수호 성인으로 공경하며 매년 그녀들의 무덤에 참배하였으며, 17세기에는 우르술라를 받들어 모시는 수녀회인 우르술라회가 창설되었다.
 
* 아래 사진은 2023년8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영국내셔날갤러리 명화전에서 본 우르술라 관련 그림이다. 

 
23쪽: “시간에 속지 말고 역사-특히 지성사-가 선형적이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31쪽: "적당한 행복에 적당히 만족하라. 인생에서 유일하게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불행이다."
=> 이말을 한 사람은 괴테. 우리 가운데 그보다 더 충만하고 더 흥미로운 삶을 살 사람은 거의 없겠죠. 그런데 그는 임종 때 -당시 여든둘이었는데- 평생 겨우 15분만 행복을 느껴보았다고 말했어요"
 
32쪽: 물론 우리는 이 수업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우리 자신의 격동적이고 안달 나는 삶에서도 우연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해요.”
 
38쪽: 그(화가)는 덧없는 것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꺽은 꽃이 시들기 시작하기 직전의 그 순간에 매달리고 있죠. 우리는 꽃을 꺽음으로써 꽃이 더 빨리 죽게 합니다. 우리는 꽃을 그림으로써 꽃이 버려진 뒤에도 그것을 오래 보존합니다. 그 지점에서 예술은 현실이 되고, 원래의 꽃은 그저 짧은 시간 존재한, 이제는 잊힌 환영이 되죠. 
 
38쪽/40쪽: 모차르트 딜레마: 삶은 아름답지만 슬픈가, 아니면 슬프지만 아름다운가? => "삶은 필연적인 동시에 불가피하죠" 그녀가 대답했다. 그 유명한 질문은 현혹하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다. 
* 모차르트는 시대를 초월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지만, 그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그의 개인적 삶은 고통스럽고 어려웠다. 
 
40쪽: 그녀가 말한대로 우리는 삶에서 늘 우연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삶에서 행운의 평균 할당량이 얼마인지 또는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 이것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이고, 어차피 여기에 "얼마가 되어야 한다" 같은 건 없는게 분명하다 - 그녀가 나의 행운에 속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41쪽: 그녀 자신에 관해 말하자면 자기 연민이 없는 것은 그녀가 삶을 대하는 스토아철학적 태도의 일부였다. 그녀는 로맨스에서의 실망, 외로움, 친구들의 배신, 심지어 공적 망신주기를 경험했지만 그런 것들을 차분하고 무관심하게 마주했다. .... EF에게는 그것이 삶에 다가가는 유일한 정신적 - 그리고 기질적 - 방식이었다. 그녀는 완강하게 고통을 견디었고 절대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신적 도움을. 

42쪽: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약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43쪽: 죽은 자는 우리에게 우리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오직 살아 있는 자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죽은 자를 더 신뢰한다. 이게 괴상한가, 아니면 분별력이 있는 건가? 여기에 덧붙여, 왜 우리는 집단적 기억-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개인적 기억보다 틀릴 가능성이 적을 거라고 기대하는 걸까


47쪽: casual sex 가벼운 섹스, causal sex 인과관계의 섹스 
 
55쪽: 게오르기우스와 용의 경우 - 어차피 주사위에 신학적인 납이 박혀있는 대결이죠 - 도덕적으로 지각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분명히 가엾은 용에게 공감해야 해요.... 이건 우월한 신앙보다는 우월한 무기의 예를 보여준다는 것에 여러분이 동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뻔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우아하게 이끌면서 우리를 교정해 주었지만 깍아내리지는 않았다. 
 
57쪽: 그녀가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쳐준 게 있다면 역사는 길게 보아야 한다는 것, 나아가서 역사는 무기력하게 혼수상태로 누워 우리가 크고 작은 망원경을 들이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활동적이고 들끓고 가끔 화산처럼 폭발한다는 것이다. 

58쪽: “실패가 성공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깨끗한 패배자보다 지고 나서 뒤끝이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하고 싶네요. 나아가서 배교자가 늘 진실한 신자보다, 거룩한 순교자보다 흥미롭습니다. 배교자는 의심의 대변자이고, 의심은 - 생생한 의심은 - 활동적인 지성의 표시죠.” 
 
60쪽: 스윈번은 이전의 수많은 유명한 선배와 마찬가지로 이 순간(로마의 여신이자 수호자가 프로세르피나에서 그리스도의 어미니 마리아로 바뀌는 순간)을 유럽사와 문명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매우 불행한 순간으로 파악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옛 신들은 빛과 기쁨의 신들이었죠. 사람들은 다른 삶은 없었다고 알았고, 따라서 이곳에서 無가 우리를 가두기 전에 빚과 기쁨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반면 새로운 기독교인은 어둠, 또 고통과 예속을 좋아하는 하나님에게 순종했어요. 이 하나님은 빛과 기쁨이 오직 사후에 자신의 사탕 과자같은 천국에만 존재하며, 거기에 이르는 길은 슬픔, 죄책감, 공포로 가득하다고 선포했죠. '우리는 죽음을 배불리 먹었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 문제에서 율리아누스와 스윈번은 생각이 같았죠.
 
63쪽: 에르네스트 르낭, 위대한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는 이렇게 쓴 적이 있어요. '나라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여러 나라가 기대고 있고 또 열심히 전파하는 창건 신화에 익숙해요. 점령한 권력에 대항한, 귀족과 교회의 압제에 대항한 영웅적 투쟁의 신화, 피를 흘려 자유라는 약한 식물을 기른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투쟁의 신화. 그러나 르낭은 그런 투쟁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르낭은 나라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나라가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기 위해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또 큰 행동과 생각에서 우리 자신을 속여야 해요, 위안을 주는 잠자리 동화를 늘 반복하듯이..... 실제의 우리와 우리가 우리라고 믿는 것 사이의 이런 어긋남은 자연스럽게 민족적 위선의 문제로 이어지는데 영국인은 이런 위선의 유명한 예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위선을 말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 또한 자기 나라의 위선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눈이 멀어버린 상태죠.
 
71쪽: 나는 점심을 먹다가 한번 왜 성인을 가르치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나는 호기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역설적으로 젊은 사람일수록 자기 확신이 더 강해요. 그들의 야망은 외부인의 객관적인 눈에는 모호해 보이지만 자신들에게는 선명하고 성취가능해 보이죠. 반면 성인의 경우.... 일부는 그저 즉흥적으로 등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삶에서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와요. 자기가 뭔가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그런데 이제 상황을 바로잡을 기회 -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기회 -가  왔다는 느낌. 나는 그게 대단히 감동적이라고 생각해요."
 
90쪽: “현재의 과제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때 더 긴요하다.” 
 
92쪽/120쪽: J, 서른 한 살에 죽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 페르시아의 사막에서 죽임을 당했고, 창백한 갈릴리인에게 졌다. 
 
133쪽: 나중에 율리아누스는 계몽주의 사상가, 불가지론자, 자유의지론자 등에게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그 덕에 그의 이름과 명성이 유지되었다. 역사의 변하는 빛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인물. 어떤 사람들에게는 EF가 아이러니를 섞어서 표현했듯이 '불굴의 영웅'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탄의 동생이나 다름없고.

 

160쪽: 패배한 지도자(율리아누스). 만일 그가 30년 더 통치하여 기독교를 매년 주변으로 부드럽게 몰아내다가 강력하게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를 다시 강화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랜 그리스-로마의 방식들이 말짱하게 남아있고 위대한 학문적 장서들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르네상스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계몽주의의 많은 부분이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계몽주의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청나게 강력한 국교의 강요로 인한 오랜 세월의 도덕적 사회적 왜곡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를 14세기 동안 살고 있었을 것이다.


217쪽: 일관된 서사란 것은 대립하는 판단들을 화해시키려 하는 것이기에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검토해 볼 만한 암시적 사실들을 그냥 나열하여 어떤 사람을 설명해 보는 것도 똑같이 가능할지 모른다. 

 

229쪽: 그녀는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사막에서 죽은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이교 신앙과 헬레니즘의 참사라고 이야기했다. 또 일신교의 승리 - 이자 재앙 - 였다고. 기독교의 지배와 부패가 "유럽 정신의 폐쇄"를 낳았다고. 율리아누스는 잇따라 등장하는 여러 교황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했다고. 환히 - 그래 그녀는 구체적으로 환희라고 말했다 -가 유럽에서 빨려나갔다고, 카니발 같은 이교적 생존물이 허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또 가톨릭과 신교 양쪽의 압제적 성격.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에 대한 수치스러운 박해와 추방. 우리의 도덕적 태도와 행동의 원천은 우리 대부분이 의심하는 것보다 먼 과거에 있다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짧은 치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그녀의 근본적 믿음. 

 

240쪽: 그녀를 더 사랑했다는 게 아니라 - 그건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녀를 신중하게 사랑했다는 거다. 삼가면서, 또 무겁게. 

 

243쪽: 너와 엘리자베스 핀치의 관계를 짧게 묘사하라. "그녀는 나에게 조언하는 벼락이었다."

 

252쪽: 기번은 심술궂게도 "이교도 지배 300년 동안 처형당한 기독교인보다 기독교 제국 한 해 동안에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이 더 많다는 것은 신학적 엄밀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유익한 자료"라고 썼다.

 

254쪽: 런던에서 브뤼셀을 거쳐 암스테르담까지. 나는 늘 긴 기차여행을 즐긴다. 무슨 음식을 먹을지 무슨 책을 읽을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적절한 책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288쪽: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본다. 뭐,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291쪽: 그녀 자신은 어떤 것도 운에 맡기는 일 이 거의 없었음에도, 내 생각으로는, 나에게 자신의 문학적 찌꺼기에 대한 책임을 넘김으로써 재미있는 방식으로 바로 그 일을 했다. 재미있는 방식으로 - 그래, 그녀에게는 아이러니를 멋지게 구사하는 재치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반쯤 지워버린 자취를 쫓아 에너지나 관심이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운이었다. 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책을 재구축할 시도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도 운이었다. 내가 그녀의 삶을 재구축할 시도를 하느냐 마느냐 - 그녀는 예상도 하지 못했을 텐데-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스웨이드(suede): 새끼 양이나 새끼 소 따위의 가죽을 보드랍게 보풀린 가죽. 또는 그것을 모방하여 짠 직물 
* 트위드(tweed): 양모로 짠 거칠어 보이는 직물
 

네이버 책 소개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읽는 건 하나의 특권이다.”_타임스
살아 있는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 6년 만의 장편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신작 장편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가 다산책방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연애의 기억』 이후 국내에 6년 만에 선보이는 줄리언 반스의 작품으로 “이것이 줄리언 반스다”라는 극찬과 함께 다시 한번 그만이 가능한 독보적인 이야기로 문학적 성취를 거두었음을 증명했다.

소설은 결혼생활과 직업적 실패를 겪고 고비를 맞은 한 남자가 삶에 큰 영감을 주는 교수를 운명처럼 만나면서 시작한다. 언제나 압도적인 일인칭 화자를 내세워 강렬한 질문을 던지는 줄리언 반스는 이번 작품에서도‘닐’이라는 화자를 앞세워 매혹적인 허구의 인물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와 역사의 승자에 의해 배교자로 불리는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에 대해 탐색해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지 못했던 물음에 직면하게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가?’

어느덧 여든에 가까운 줄리언 반스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글을 쓰며 천착해 온 화두의 정수가 모두 담긴 이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을 과감히 넘나들며 기억의 한계와 역사의 왜곡, 그리고 인간과 삶의 다면성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펼쳐낸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두고 장르 불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줄리언 반스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달리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다. 감히 줄리언 반스 40년 문학의 결정판이자 그의 문학적 지문과도 같은 작품이다.

 

출판사 서평

한 남자가 매듭지어야 할 두 사람을 향한 필멸의 과제,
선명해질수록 희미해지는 진실의 아이러니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삶에 어떤 결핍을 느끼던 닐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에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만난다. 거위 배 속에 사료를 채우듯 머릿속에 이런저런 사실을 주입하는 수업은 하지 않을 거라는 그녀를 보며 닐은 깨닫는다. 살면서 이번 한 번만큼은 자기 자리를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기대처럼 핀치는 특별한 교수였다. 학생들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그들의 작은 생각을 흥미로운 것으로 바꿔주는 ‘어른’이었다. 닐은 자신보다 훨씬 똑똑한 그녀를 흠모하며 졸업 후에도 약 20년간 만남을 이어간다. 둘은 75분이라는 정해진 시간 동안 함께 점심을 먹으며 철학과 역사에 대해 깊이 토론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핀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닐은 그녀가 평생 써온 서류와 노트 들을 유품으로 전해 받는다. 그는 여기에 어떤 신호가 있다고 느끼며 이에 대해 진지한 탐문을 해나간다. 이전에 미완성 과제로 제출했던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에세이를 완성하는 것, 그리고 엘리자베스 핀치를 회고하는 것. 그러면서 점점 예상치 못했던 진실에 다가간다.

“우연이라는 불가해한 힘 앞에
삶은 얼마나 파편 된 진실이며 필연적 거짓인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줄리언 반스가 평생에 걸쳐 답하고 이해하고자 했던 주제를 지금껏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관계의 역학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처음 작가로서 글을 쓰기 시작할 당시, 학원 소설이 유행했는데 반스는 이를 보며 자신은 절대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는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와 학생 닐의 이야기를 통해 40년 동안 골몰했던 문학의 주제 의식을 더 깊고 더 도전적으로 펼쳐내기에 이른다.

닐에게 엘리자베스 핀치는 “조언하는 벼락이었다”. 신비롭고 엄청난 힘을 가진 인물로 그의 생각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생이었다. 닐은 엘리자베스 핀치를 회고하며 그녀라는 사람을 일관된 서사로 만들려는 시도를 해나가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핀치가 가장 경계했던 ‘일신(一信)주의’와 배치되는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결국 다른 학생들의 목소리를 통해 닐이 생각하는 엘리자베스 핀치는 그의 고집스러운 기억에만 존재했음이 역설된다.

이 소설은 단일한 믿음과 편의적 회피를 오가는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다. 우연이 틈입하는 이 세계에서 더 잘 이해했다고 믿는 이의 생각은 얼마나 무력한지, 역사는 왜 해석에 불과한지 끈질기게 되짚으며 성찰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에서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해볼 수 없다”는 깨달음에 다다른다. 우연이 자기 뜻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이야말로 삶을 견디는 인간의 필연적 숙명이므로.

읽을수록 새로운 층위를 발견하게 되는
줄리언 반스의 가장 지적이고 가장 매혹적인 소설

명실상부 살아 있는 영국 문학의 전설, 줄리언 반스의 신작은 언제나 문학계의 큰 사건이다. 소설과 에세이, 전기 등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는 하이브리드 작가로서 그가 써내는 글은 평단의 단골 연구 주제로 올려진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반스의 소설이 뛰어난 작품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가디언),“줄리언 반스의 책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특권”(타임스)이라는 격찬으로 이어진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철학을 향한 줄리언 반스의 진심 어린 애정이 돋보이는 책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면서 역사에 기독교의 배신자로 기록된 율리아누스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해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제대로 평가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 과정에서 불려 나오는 플라톤, 소크라테스, 볼테르 등 수많은 사상가와 철학자, 작가의 이야기는 지적인 즐거움을 안긴다.

줄리언 반스는 내내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명료한 문장을 세공해 왔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아이러니로 이야기를 치밀하게 직조해 펼치며 독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닐과 엘리자베스 핀치 그리고 율리아누스까지 세 인물이 맞물리며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생각의 닻을 깊게 내릴수록 새로운 층위를 발견하게 한다. 단언컨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보물” 같은 소설이 되어줄 것이다.

 

목차

하나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추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