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아츠앤트래블님 해설 2부 (2023.8.7)

클리오56 2023. 8. 7. 12:12

지난 번 아츠앤트래블님의 1부 10개 작품에 이어 이번에는 2부 8개 작품 해설을 정리했다. 

 

1. 사소페라토: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 사소페라토, 본명 조반니 바티스타 살비라고 하는 예술가의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라는 작품입니다. 사소페라토는 로마 와 피렌체 중간에 악베니노, 그 동쪽에 마르케 지방이라는 곳에 사스페라토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 그는 1609년에 태어났는데 카라바주보다 40년 정도 뒤늦게 태어난 화가인데, 그 시기는 카라바조와 같은 바로코 양식이 로마에서 막 피어났다. 부친도 화가였으며, 그는 바로코 양식의 영향을 받다가 로마에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르네상스 시기 거장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모의 얼굴에서도 굉장히 좀 이상화된 그런 라파엘로의 스타일이 좀 많이 느껴지는데 그래서 이 화가는 바로코 시기의 화가였지만 고전적인 미학과 더 일치하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는 그림을 통해서 보실 수가 있다. 이 얼굴에서도 온화한 느낌이 있다. 물론 저는 라파엘로의 작품을 더 좋아합니다. 이 그림 같은 경우는 고요하고 정적이며 신성한 성모 마리아가 더 많이 강조되지만, 라파엘로는 진짜 엄마 같은 그 따뜻함이 느껴진다.

 

- 사소페라토가 1609년도에 태어났으니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20대라고 친다면 1630년대이다. 그 시기는 반종교개혁의 움직임이 굉장히 강할 때라 뭔가 회개, 금욕에 대한 그림이 많이 그려지던 시기라고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스페라토의 그림을 보시게 되면은 굉장히 좀 경건하고 종교적인 스타일이 많이 강조가 되었다라고 보실 수가 있죠. 그래서 이 사스페라토 앞에서는 뭔가 그림 자체가 굉장히 고요한 느낌, 그리고 영적 영성 뭐 이런 그 감각들이 상당히 잘 발산되고 있다. 뭔가 좀 따뜻한 느낌도 있지만 굉장히 초월적인 아름다움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뭔가 이 빛이 어디선가 인공적인 빛이 이렇게 쫙 들어오고 있는데 그 빛을 통해서 마리아를 강조하고 비춰주면서 뭔가 모르게 그 관람자들로 하여금 이 그림 속에 뭔가 이 고요한 어떤 그 묵상의 순간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그런 느낌을 좀 받을 수가 있거든요. 신앙심을 터칭하게 상당히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2. 귀도 레니: 성 마리아 막달레나 

- 귀도 레니도 역시 사스페라토처럼 바로코 시기 때 활동했었던 예술가라고 보실 수가 있어요. 사소페라토가 굉장히 유능하고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탁월했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지만, 당대에는 귀도 레니가 훨씬 더 특별한 화가 대우를 받았었고, 살아 생전에 굉장히 성공했었고 인정받았었던 예술가이다. 음식으로 유명한 볼로냐 출신인데 그림 자체는 플랑드르 쪽의 예술가들에게 좀 영향을 받았었다.

 

-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진짜 유명하죠,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으로도 알려진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당시에 이 귀도 레니가 살아 있었을 땐 아주 큰 이슈가 됐었던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본인이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 아버지한테 성적으로 오랫동안 학대를 당했었고 결국에 이제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계모, 형제들과 공모를 해서 아버지를 죽였다. 베아트리치 첸치가 그걸 사고로 위장했지만 결국에는 진실이 다 밝혀져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그 사건 직후에 그린 베아트리지 첸치의 초상으로도 굉장히 유명하다. 그 작품이 그렇게 걸작으로 간주된 이유가 뭐냐면

인간의 감정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적인 학대를 당했었던 베아트리체 첸치에 대한 어떤 굉장히 동정 묘사가 그 안에 있어요. 뭔가 이 무고한 그런 피해자다라는 것을 귀도 레니는 그런 부분을 그림에다가 넣었어요. 아버지를 오죽하면 죽였겠냐라는 어떤 그 연민의 눈으로 베아트리지 첸치를 무고한 어떤 여성으로 피해자 느낌으로 굉장히 아름답게 그렸다라는 것 그 부분이 그 작품을 걸작으로  만들어 준 가장 큰 이유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귀도 레니는 굉장히 뭐랄까 공감과 연민을 이렇게 끌어내는 그런 그림, 그런 스타일로 상당히 유명한 화가다.

 

- 성 마리아 막달레나에서는 금발이 아름다운데 몸집이 좀 크게 느껴져요. 중요한 것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런 공감과 자신을 끌어내는듯한 그 감정적 표현이 굉장히 좋다. 아까 여기 누군가 얘기하셨죠 그 눈물의 그 슬픔이 잔뜩 들어있다라고, 그래서 굉장히 좀 슬펐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사실 그런 예술 작품을 통해서 인간적 감정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감정적 묘사가 아주 탁월하다는 것, 지금 참회를 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모습이거든요.

진정한 참회라고 하죠, 그래서 그런 막달라 마리아의 그 슬픔의 감정이 있잖아요, 그거를 굉장히 깊이감있게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그녀의 이 눈물과 뭔가 이 표정으로 그런 부분을 상당히 잘 강조해서 그렸다는 것. 게다가 빛과 그림자도 되게 적절하게 잘 사용한 거 같죠. 그림을 보시게 되면 카라바조 처럼 뭔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그런 사이에 대비를 너무 잘 활용했다라는 것. 이 화가가 그림을 워낙 잘 그리니깐요 그런 빛으로 그림자로 깊이감을 드라마틱하게 잘 만들고 그런 부분들을 너무 능숙하게 잘 다루니까 인물의 입체감이 상당히 강조가 되고 볼륨감이 살면서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감이 진짜 잘 드러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막달라 마리아의 이 얼굴이 하나의 슬픔의 표상이라고 보실 수가 있는데, 이런 표정의 그림을 굉장히 많이 그렸어요. 여러 그림에서 이 표정이 좀 많이 등장을 한다라는 것, 그래서 존재감을 상당히 잘 강조해서 그 슬픔을 굉장히 강조해서 그린 너무나도 아름답고 멋진 작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아주 걸작 중에 걸작이죠.  이번에 이 작품 왔는데 여러분들도 가셔서 한번 그 슬픔의 감정을 여러분들이 한번 같이 공감하면서 느껴보시는 것을 제가 권해드립니다.

 

- 그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나도 유명한 존재잖아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그런 인물 중에 한 명이라고 보실수가 있죠. 그래서 복음서에서 등장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 중 한 명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데 아주 중요한 인물이죠. 그래서 그림 테마에 상당히 많이 등장을 합니다. 특히 성화에서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여인이에요. 그래서 진짜 아주 의미 있는 그런 인물이다라고 보실 수가 있는데 지금 이 그림은 딱 어떤 모습이냐면 여러분 참회를 하기도 하는 그런 느낌도 있지만 뭐랄까 저는 그런 느낌을 또 받아요, 뭐냐면 막 기도를 하고 있는 듯한 참회하며 그런 모습이기도 하지만, 뭔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있잖아요, 그 십자가 위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아래에서 바라보면서 슬픔에 북받쳐서 울고 있는 그런 느낌도 이 그림 속 안에서 드러나죠. 막달라 마리아라는 존재는 그런 슬픔을 견뎌냈어야만 하는 그런 존재잖아요. 그래서 그 슬픔의 표상으로 이런 표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귀도 레니가 만들어낸 표정이다라고 보실 수가 있죠. 

 

- 근데 사실 이 그림이 어깨가 이렇게 드러난 옷 그리고 풍성한 금발이 굉장히 인상적이다라고 말씀을 지금 많이들 하고 계시는데 이게 사실 막달라 마리아의 전통적인 코드예요. 금발의 여인으로 표현하는 것은요 그게 왜냐면 그 중세에서는 과거에 유럽에서는 굉장히 황금색이 금발이라는 색채가 사실 매력적인 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천박한 그런 색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전통적으로 그 매춘으로 묘사를 많이 했습니다. 현재는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보지 않습니다 과거처럼. 사실 성경에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고 하는 내용은 없어요. 그녀가 죄지은 여인이라고 등장을 하는데 죄지은 여인이라는 그 자체가 그렇게 언급된 바를 가지고 창녀라고 해석을 중세시대 때 했었던 거죠. 그러니까 뭐랄까 중세에서 여자가 죄를 저질렀을 것이다라는 것, 대부분 성적인 죄라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모든 성적인 죄는 남성과는 상관없이 다 여자한테 지어지던 그런 시기였었어요. 그래서 죄지은 여성 그러니까 손쉽게 성을 파는 여성이었을것이다라고 자기네들끼리 이제 남성적 시각에서 해석을 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와 같은 금발로 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라고 보실 수가 있죠. 과거에는 그랬잖아요 여성에 대한 인식이 사실 성인지가 잘 이루어지지 않던 그런 시기였었기 때문에 근데 하지만 지금은 사실 막달라 마리아는 진짜 제자 중에 제자에요. 진짜 제일 놀라운 여성입니다. 왜냐면 예수가 막 체포됐었을 때 그런 제자들이 어떻게 했죠. 그 추종하던 사람들이 앞에서는 뭐 과거에는 막 주님을 내가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놓고선 다 큰 소리를 쳐 놓고선 예수가 막상 체포당할 때는 어떻게 했어요 막 다 도망가잖아요 심지어 막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랬었지만 거의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의 순간에서 십자가 밑에 있었던 여성이에요. 대단한 진짜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그 죽음의 순간에 같이 있었던 여성이에요. 끝까지 예수가 고통 당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그리고 애를 태웠었던 막 진짜 슬퍼서 울었었던 그리고 심지어 부활한 예수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어쨌든 중세에는 좀 그랬었죠. 그래서 그 인식이 그렇게까지 뭐랄까 성숙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녀를 굉장히 좀 안 좋은 이미지로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라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이 그림 자체가 반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이제 회개와 금욕에 대한 하나의 표상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요청하는 그림들이 상당히 많았었죠. 그래서 귀도 레니가 막달라 마리아를 상당히 좀 많이 그렸었다. 그런데 지금 이 그림에서 사실 이 금발을 하고 한 것은 하나의 표상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금발의 표현이 있지만 귀도 레니는 단순히 막달라 마리아를 성적인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은 듯하죠. 뭔가 인공적인 빛을 잘 넣어서 고요함 속에서 슬픔을 끌어내고요, 그러니까 세속적인 삶에서 참회할 것을 굉장히 호소력있게 관람자들에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라는 것.

 

- 어쨌든 귀도 레니는 바로코 시대를 이끌었었던 아주 대표하는 화가 중에 한 명이다라는 것 알아봐 줄만큼이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굉장히 숙련되고 테크닉이 상당히 좋았었던 아주 영향력 있는 예술가구요. 그리고 빛하고 뭐 그림자도 정말 잘 활용하고 능숙하게 무엇보다 감정적인 그 묘사 그 표현력이 진짜 뛰어나서 정말 많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었던 대단한 예술가다라는 것.

 

 

3. 안토니 반 다이크: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 

- 안토니 반 다이크, 혹은 안톤 반 다이크로 불린다. 바로크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 중의 한 명이고 그랜드 투어 멤버이다. 그의 스승이자 엄청난 테크니션인 루벤스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 화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귀족들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들, 즉 셀럽들을 전문적으로 사진 찍는 포토그래퍼라고 생각을 하셔도 좋다.  그런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닌데,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었다.

 

- 그는 1599벨기에 안토펜에서 태어났는데, 루벤스가 활동한 곳이다. 루벤스가 안토펜에서 태어났다고 많이들 이야기하시는데 사실 루벤스가 태어난 곳은 독일 지겐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이끌려서 다시 안토펜으로 돌아와 유년시절을 보냈었던거죠. 안토니 반 다이크는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여러 나라들을 오가면서 정말 엄청난 활약을 했었던 예술가이다. 반 다이크는 루벤스와 개인적으로 또 직업적으로도 긴밀한 그런 관계였었다고 하는데, 루벤스의 스튜디오에서 한때 조수로 일한 기록이 있고, 그리고 그림을 배운 적이 실제로 있다. 그래서 사실 두 작가가 되게 교감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왜냐면 루벤스도 반 다이크의 실력을 인정을 하고, 그래서 서로 작품에 대해서 정말 많은 존경심을 가지기도 했었고 그리고 찬사를 나누기도 했었던 그런 굉장히 좋은사이였다. 그냥 단순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서 서로가 화가로서 굉장히 존중하였다. 당시 루벤스는 유럽 최고의 화가였는데 반 다이크를 자신의 제자이자 동료 화가로서 인정을 하고 굉장히 존중했었다.  

 

- 그림을 보면 손가락, 구두 그리고 파마 진짜 잘 나왔다고까지 얘기해 주시는데 그만큼 그림이 워낙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계신거다. 반 다이크는 여러 프로젝트를 루벤스랑 같이 해요, 그리고 루벤스가 클라이언트들이나 후원자들한테 반 다이크가 노출될 수 있도록, 그리고 성공할 수 있도록 후원도 많이 해주었다. 어떤 일각에서는 사제지간에 경쟁을 했었고 그리고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 반 다이크가 초상화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원래 안토펜 지역이 성화를 많이 주문하는 도시였었거든요. 그래서 루벤스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가 있었는데, 반 다이크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리니까 너는 그냥 초상화로 가라고 루벤스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라는 설도 있다.

 

- 어쨌든 루벤스의 권유로 반 다이크는 이탈리아도 경험하고,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게 돼서 찰스 1세의 수석 궁정화가로 일을 했었죠. 반 다이크는 아마 영국에서 사망했는데, 그래서 영국 특히 내셔널 갤러리에 반 다이크의 작품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마 가장 많은 반 다이크의 작품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찰스 1세의 수석 궁정화가 시절에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 그림은 찰스 1세가 주문한 겁니다. 왼편이 존 스튜어트로 형이고, 오른편이 동생인 듯하다. 이 형제들은 지금 막 유럽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어요. 당시 17세기 때 영국을 중심으로 해서 유럽의 상류층 귀족 자제들은 사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탈리아를 갑니다. 그래서 고전 문물을 익히는 여행을 떠나는데 그랜드 투어라고 한다. 일종의 교육 여행으로 3년 정도 나가는데, 이 어린 사촌들을 긴 여행을 떠나보내기 전에 초상화로 남길 것을 찰스 1세가 안톤 반 다이크한테 주문한 것이다.

 

우선 그 금색으로 된 자수 그리고 또 레이스 컬러 이런 것들이 굉장히 잘 강조가 됐고 눈빛도 뭔가 좀 당당한 눈빛이 있죠. 둘 다 형제들이 사실 좀 약했을 것 같아요. 굉장히 좀 당당한 그런 느낌, 그 시선으로 하여금 뭔가 반 다이크는 귀족적인 느낌을 잘 전달하려고 한거죠. 그러니까 고귀한 신분이다라는 것을 이런 눈빛을 통해서도 좀 보여주고 있고 그리고 옷 레이스 디테일이라든지 그리고 이런 컬러, 실버 막 이런 조화 엄청 좋죠. 색채 좀 보세요 굉장히 세련된 그런 느낌. 레이스 디테일 보면 진짜 놀라워요. 그리고 은색 옷 좀 보세요, 이 더블 코트인가요, 진짜 그 색채의 표현이 기가 막히죠. 이런 명품을 입히면서 우아함을 더한다. 이런 느낌을 가지고 혈통, 지위, 가족 관계 이런 것들을 잘 전달한 거죠. 귀족으로서 그런 느낌을 진짜 잘 강조를 했다. 이런 디테일을 통해서 이 두 명이 그런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 그런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형제간의 위치를 통해서 그들의 신분관계를 느껴볼 수 있게 하고요, 그리고 우리가 좀 약간 이렇게 올려다봐야 되는 그런 느낌을 통해서 즉, 우리 관람자의 위치를 통해서 또 그들을 더욱더 고귀한 신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러니까 굉장히 치밀하게 계산된 그런 초상화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고귀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런 이미지를 뽑아서 그리는데 아주 탁월했었던 그런 사람이다. 이 그림은 특히나 반 다이크의 작품 중에서 굉장히 걸작으로 평가가 되는 작품이다.

 

- 이 두 형제가 그 이후에 5~6년 지난 후 찰스 1세가 의회파하고 왕당파 사이의 내전에서 사망했었다라고 하죠. 그래서 진짜 그랜드 투어를 갔는지 안 갔는지 모르겠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형제 작품은 상당히 잘 그려진 아주 멋진 초상화다라는 것이죠. 두 사람의 코가 눈길을 끄네요, 실제로는 명성이 별로였지만 화가가 그냥 끌어내준 겁니다. 구두는 왠지 부츠 같은 느낌이죠, 지금 신어도 뭐랄까 되게 아방가르드~

 

 

4. 얀 스테인: 여관(깨진 달걀) 

- 네 번째 픽은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테인인데, 이 작품까지 왔다는 거 좀 놀랬어요, 왜냐면 한국에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런 예술가인데 사실은 네덜란드를 진짜 대표하는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굉장히 중요한 그런 예술가이다. 얀 스테인의 작품은 풍속화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이 그림 너무 재밌었고요, 위트 넘치는 표정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네덜란드가 그런 풍속화가 되게 유행을 했었던 그런 지역 나라였었기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그런 인간의 군상, 시민의 일상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 시기 때 17세기 특히 풍속화가 상당히 많이 나오던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그런 그림을 그린 화가다라고얀 스테인을 보시면 되겠어요. 그래서 보통 시민의 일상, 거기에다가 유머 그리고 이제 풍자를 섞어서 그림을 그렸었던 그런 대표적인 예술가이다.

 

- 그림을 보면 난장판이 된 여관입니다. 지금 저 남자 완전 취했죠, 그래서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성추행하고 있네요. 여성의  치마를 막 들어 올리려고 하고 완전히 술이 떡이 돼가지고 맛이 갔습니다. 표정 진짜 리얼하게 잘 표현했네요. 그리고 이제 여성이 뭔가 되게 정숙한 여인으로 표현이 된거 같아요. 난장판에서 같이 휩쓸리는 여성들의 얼굴은 또 장난 아닙니다. 근데 이 여성은 굉장히 단정하게 표현을 했죠, 그래서 단호하게 그 남성에게 손을 내밀어서 자신을 이렇게 보호하고 있죠. 앞에 남자 지금 파이프에다가 담배를 열심히 채워 놓고 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사람이 얀 스테인일 거 같아요. 자신의 모습을 좀 자주 그려 놓거든요. 뒤쪽 남자는 술병을 들고 재밌어 하는 표정이고, 맨 뒤에 아이는 뭔가 먹고 있는 듯한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깨진 달걀이 보이는데 의미가 많겠지만 남성의 깨진 욕망, 왜냐면 여성의 모습이 너무 단호하고 단정하게 잘 보이고 있어요. 굉장히 잘 표현을 했거든요. 그런 남성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적인 그 욕망을 깨뜨려 버린 여성의 행동을 어떻게 칭찬하고 있는듯한 그런 느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보통 굴이나 홍합은 성적으로 무절제함 그리고 탐욕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홍합 껍질들이 지금 아래 보이고 있는 것은 이런 술 취하고 한 남성의 이런 무절제한 행동에 대해서 어떤 비난하는 그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것. 근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얀 스테인의 작품을 볼 때 그림의 의미도 의미지만 뭐랄까 세부묘사나 이런 부분들이 강조되는 그런 그림을 많이 그렸었던 예술가죠. 특히 사람들의 표정도 되게 연극처럼 자연스럽게 잘 그리는데 상당히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화가이다.

 

- 얀 스테인은 렘브란트가 태어난 레이덴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요. 그리고 이 사람이 어디서 그림을 배웠냐면 프란스 할스에게서 이다.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렘브란트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이다. 프란스 할스가 활동했었던 하를렘에서 그림을 배웠다고 해요. 근데 이 시기가 17세기 때가 그림이 되게 호황기예요, 그리고 아트테크, 즉 그림을 투자적인 목적으로 구입했었던 그 개념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부터 먼저 시작이 돼요. 그래서 당시에 그림들을 되게 많이 샀었고, 그만큼 화가들이 상당히 많았었고 그리고 굉장히 출혈 경쟁들을 합니다. 얀 스테인은 당시에는 메이저 화가가 아니었기에 수입도 적고 그러다 보니까 다른 곳으로 이사가서 맥주 양조장도 하고, 또 다시 고향 레이덴으로 가서 여관업을 합니다. 이 사람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그 무대를 다니다보니까 러 예술가들의 스타일을 많이 흡수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림에서 등장하는 여러 세부 묘사, 공간의 탁월한 묘사,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났다. 그리고 지역의 어떤 특징들을 자기 스타일로 잘 융화시켜서 자기의 주제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인이 투잡을 뛰었잖아요, 여관업도 하고 맥주 양조장 그러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아마 봤겠죠. 진상들도 경험하고 그러니까 이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 그들을 관찰했고 자신의 작품의 주제로 삼았을 겁니다. 양조장은 거기서 술집도 있었을테니까 빠도 있고 그럴테니까 술 마시고 노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아마도 되게 흥미롭게 느껴졌을 거예요. 그들의 모습들을 상당히 잘 디테일하게 관찰을 하고 그것을 자신의 주제 메인 주제로 그림을 그렸었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얀 스테인이 굉장히 높게 평가받는 부분 중에 하나가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만의 장르, 자신만의 어떤 개성이 굉장히 뚜렷한 화가였었다는 거죠. 그래서 지역 지역에 그런 독창성들을 자신의 스타일로 상당히 잘 녹여서 표현한 그래서 풍경도 능했고 사람들 표정 이런 감정의 느낌도 잘 표현하고 정물의 디테일도 굉장히 좋죠. 프라이팬 같은 것도 지금 보세요, 여기에 음식 찌꺼기 같은게 좀 남아 있잖아요. 이런 부분도 상당히 잘 관찰돼서 표현한 굉장히 다재다능한 화가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토리텔링 상당히 좋구요, 아주 훌륭한 화가로서 17세기 그 네덜란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에 한 명이다. 

 

5. 카날레토: 베네치아 카나레조 입구 

6. 카날레토: 베네치아 카스텔로의 산 피에트로 

-  그림 베네치아의 풍경은 카날레토가 그린 운하이다. 그는 엄청 대단한 예술가, 굉장히 유명한 화가이다. 아주 눈이 시원해진다. 그는 18세기 화가이다. 카날레토는 모든 작품들이 다 베네치아의 풍경 그리고 베네치아의 어떤 도시 경관을 주로 그렸었던 예술가이다. 특히 여기가 까날 그란데, 대운하 주변이며 굉장히 멋진 궁전들이 쫙 펼쳐지고 그래서 그 운하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을 주로 그렸고요 그리고 주로 베네치아의 유명한 랜드마크를 그린 화가이다. 카날레토라고 하는 이름의 뜻도 작은 운하라는 뜻이다. 진짜 이름 답죠, 그래서 대운하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의 풍경을 주로 많이 그린 예술가다. 진짜 이 수면에 표현이 너무 좋죠. 지금 보시게 되면은 사실이 그림 해상도가 아주 높지는 않아서 카날레토의 아주 진가를 지금 제대로 느낄 수가 없는데, 이 그림 같은 경우는 진짜 현장에 가서 여러분들이 디테일들을 하나둘씩 다 뜯어서 보시면은 훨씬 더 감동하실 수 있다. 베네치아의 노을도 기억이 나시고요.

 

- 대운하에서 바라다 보이는 교회가 있는데 지금도 있어요, 산 제레미야 교회 모습도 보이고 여기 지금 다 있는 곳이에요. 이탈리아 베네치아 가시면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궁전, 다리도 그대로 현재 있고요. 1700년대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여기 지금 많죠 그 건물들이 지금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다. 궁전은 지금 전시장으로 입장료 내고 들어간다.

 

- 카날레토가 도시를 그냥 그리는게 아니라 도시 풍경의 복잡함을 굉장히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포착해서 그리는데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 특히 건축의 요소들을 진짜 정확하고 디테일하게 너무나도 잘 그리는 화가였다. 원근법의 대가답게 그리고 또 기학적인 균형을 딱 담아서 그리고 빛의 효과를 너무 잘 활용해서 정말 멋진 도시의 그 풍경을 그린 예술가다. 굉장히 인기가 많은 화가였는데, 특히 영국 사람들한테. 그래서 내셔널 갤러리에 그의 작품이 많은 겁니다. 베니스 뿐만 아니라 유럽 엘리트들 사이에서 굉장히 많은 찬사를 받았었던 예술가인데, 특히 18세기 유럽, 영국 수집가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18세기 때 영국 귀족 자제들이 이탈리아로 그랜드 투어 다녀오며 베니스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있었겠죠, 그리고 카날레토그림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국에서도 그림을 그렸고, 실제로 영국 화가들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영국 화가들이 또 그에게서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런던 도시를 되게 웅장하게 바라보고 그리고 아름다움을 강조하게끔 그런 인식을 담아줘서 그런 인식을 형성하게끔 유도를 해서 또 그림을 가리키기도 했죠. 그리고 실제로 또 직접적으로 다이렉트한 지도를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카날레토가 영국 화단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 영국에 카날레토 스타일이 보급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토머스 게인즈버러, 토머스 존스가 있다. 풍경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리처드 윌슨은 아예 직접적으로 카날레토 작품을 연구하기 위해서 아예 베니스까지 갔었던 그런 예술가이다.

 

- 6번은 베네치아 카스텔로의 산 피에트로 성당으로 동쪽 끝에 있다. 과거에는 대성당 역할을 하고 베니스 국가원수의 개인예배당으로 활용됐었다. 수면의 표현, 일을 하고 있고, 하역하고 있는 그런 인물들의 표현, 그리고 교회를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한 그 어떤 건축적 특징들, 이런 것들도 그림으로 너무 잘 표현한 굉장히 멋진 작품이다. 

 

 

7. 존 컨스터블: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 

존 컨스터블의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 작품도 왔는데, 아마도 내셔널 갤러리에서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에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그림입니다. 존 컨스터블은  영국 사람들이 진짜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터너와 함께 그 영국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화가죠. 저는 사실 윌리엄 터너보다 존 컨스터블을 더 좋아하는데, 따뜻한 자연의 표현 이런 부분들이 상당히 좀 좋거든요. 뭐랄까 웅장한 풍경 보다는 좀 소박한 그런 시골의 풍경 이런 부분들이 되게 이쁘게 잘 그려진 것 같아서 존 컨스터브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윌리엄 터너 같은 경우는 뭔가 자신의 신상에 비친 풍경을 되게 드라마틱하게 과장하고 비틀어서 표현하는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데 컨스터블 같은 경우는 좀 더 자연주의에 충실한 그런 그림을 그렸다. 자신 고향의 풍경을 거의 끌로드 로랭이나 폴생의 고전적 풍경화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런 예술가라고 보실 수가 있겠죠. 

 

- 윌리엄 터너 같은 경우는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웅장한 풍경을 의도적으로 찾아다니거든요. 그래서 알프스, 이탈리아 이런 것들을 굉장히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존 컨스터블은 단 한 번도 영국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화가라고 해요. 그래서 영국 자연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춰서 그림을 그렸었죠. 자신의 고향 이스트버그 홀트 지역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많이 그렸었는데 그림 속 위치는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한 3km 정도 떨어진 장소라고 하네요. 그래서 굉장히 평온하고 뭔가 정감이 느껴지죠, 자신이 태어난 그런 고향의 느낌을 그렸으니까. 이 그림은 진짜 현장에서 보는게 더 좋아요. 대기에서 막 빛이 녹아 있고요, 그리고 대기의 느낌도 되게 좋아요. 그리고 그 빛에 의해서 여기 주변이 시시각각 변하는 그런 나무의 컬러, 나무가지 끝의 색들, 그리고 빛과 그늘 이런 표현들이 있죠. 수면 위 표현도 너무 좋고 뭔가 그냥 색채가 맑게 숨쉬는 느낌, 진짜 자연의 그 느낌 안 느껴지세요? 저는 그런 느낌이 좀 있어요.

 

멀리 이렇게 보시면 먹구름이 막 몰려올 것 같은데 그런 느낌도 좀 있고, 소나기가 막 떨어질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있죠. 실제로 과거 프랑스의 외젠 들라크루아라는 화가가 존경한 그런 화가라고 합니다. 존 컨스터블에게는 카미유 코로 스타일도 좀 있다. 그래서 뭔가 상쾌하고 맑고 여름에 그 얕은 어떤 냇물 위에서 아이들 장난하고 있고 너무 정감이 가는 자연의 느낌을 잘 살려서 그린 아주 멋진 작품입니다.

 

 

8. 윌리엄 터너: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 윌리엄 터너의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을 소개한다. 이번에는 존 컨스터블과 바로 비교를 해보시라고 윌리암 터너의 작품을 준비를 했다. 존 컨스터블과 함께 영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대표적인 화가로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영국인 진짜 좋아하는 제일 존경하는 화가를 윌리엄 터너인데, 왜냐면 영국 최고의 미술상 이름이 터너 프라이즈이다. 터너상 그 윌리엄 터너의 이름에서 딴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최고의 미술상이죠. 그리고 또 영국인들이 또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전함 테메레르'이다. 

 

-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은 그리스 신화에서 레안드로스라는 청년과 아프로디테의 여사제였었던 헤로의 사랑 이야기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는데, 되게 유명해서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테마가 된 그런 이야기이다. 둘이 진짜 첫눈에 반해서 서로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했었던 두 남녀의 이야기를 보실 수가 있는데 지금 이 장면은 먼데서 살고있는 레안드로스가 매일 밤 바다를 헤엄쳐서 헤로를 만나러 옵니다. 그때마다 헤로가 횃불을 밝혀서 레안드로스가 어두운 바다를 헤엄치고 오도록 길을 인도해줬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폭풍우 치는 날에 헤엄쳐서 그녀를 만나러 가는데 폭풍우가 치니까 횃불이 계속 꺼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 레안드로스가 어두운 바다에서 길을 잃고 파도에 밀려서 익사를 했다. 그래서 헤로가 파도에 밀려온 레안드로스의 시신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래서 지금 여기 폭풍우가 막 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그리고 한쪽은 초승달이 딱 뜨면서 그 폭풍우가 사라진 후 고요함, 평화로움 그러니까 어떤 적막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그림이죠. 지금 그림에서의 모습은 헤로가 슬픔에 젖어서 자신도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이다. 그래서 지금 이 표현은 헤로의 큰 슬픔이 반영된 풍경의 모습이다. 윌리엄 터너가 영국 작가이기에, 그래서 비, 바람, 햇빛, 안개, 폭풍 같은 날씨가 굉장히 윌리엄 터너의 주소재라고 보실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영국 날씨가 진짜 안 좋기 때문이다. 북쪽은 더 심하다. 이 그림에서는 헤로의 슬픔을 날씨로 표현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림 우측을 보면 사람들 날라가고 있는 느낌이다. 

 

- 윌리엄 터너가 사실 괴테의 색채론의 신봉자였다. 괴테 색채론이 뭐냐면 어떤 자연의 색채는 그 실험 도구처럼 과학적으로 어떤 프리즘 이런 것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바라봐야 되는데 그러니까 어떤 인간의 감정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이 섞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렬과 흥분 이런 상태의 빨강 그리고 파랑은 수축과 차분함, 이런 것들이 반영이 된다. 그러니까 자연의 색채는 인간의 감각과 굉장히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 그림도 단순히 그냥 그 폭풍우 치는 모습에

어떤 그 느낌이 아니라 어둡고 그런 차가운 색조로써 그 비극을 암시하고, 헤로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는 어떤 그런 감정 묘사가 이 자연 풍경에 반영된 것이다라고 이제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