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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배우는 세계 경제사: 다나카 야스히로 (2023.8.10)

클리오56 2023. 8. 14. 07:20

 

 

내용 및 소감

내셔날 갤러리 소장품 전시인 거장의 시선을 관람하기 위하여 전시 작품들을 유튜브 소개로 리뷰하였고, 우연히 도서관에서 서가를 보다가 '명화로 배우는 세계경제사'를 보게되었는데 본서는 때마침 르네상스 전후부터 20세기초까지 유럽 회화를 다루니 거장의 시선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서적이라 생각.

 

ROOM 1 흑사병과 불황을 극복한 이탈리아

- 십자군 전쟁(1096~1272)부터 르네상스까지 11~15세기 이탈리아 회화를 리뷰


1. 교회의 종교화는 중세의 파워포인트

- 시칠리아 섬: 지중해 중앙에 위치하여 문명의 십자로 역할. 

-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에 있는 팔라티나 예배당: 가톨릭 종교화 + 이슬람 기하학적 무늬

-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1194~1250): 십자군 전쟁 발발에 곤혹, 가톨릭 교도이지만 아라비아어  유창, 이슬람과 우호를 원하며 협상을 체결하지만 결국 실패하여 200년간 전쟁에 돌입 => 하지만 동서교역로는 개설되면서 이슬람 문화가 유입, 생활 수준 향상, 도시경제 발전(베네치아) 

- 고딕 스타일 발전: 가톨릭의 엄숙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높이 높이 치솟음.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 문맹자를 위한 다양한 종교화와 스테인드글라스: 특히 수태고지

 

2. 다시 일어선 피렌체의 기적

- 이탈리아 결산은 3월24일: 3월25일 수태고지한 날을 한해의 시작, 이탈리아 회계연도가 이날 부터 시작. 

- 1347년 흑사병 시칠리아 상륙: 중국 기원설, 동서교역 활발해지면서 상인들 이동 용이, 최소 30%, 최대 50~70% 사망

- 피렌체 부활: 로마 교회와 메디치 가문이 손잡고 교회를 개·증축하거나 장식할 조각, 회화 제작에 힘쓰기 시작. 이렇게 재정적 뒷받침을 한 메디치 가문 같은 상인과 권위 회복을 꾀한 교회, 혁신적인 창작을 시도한 예술가들, 이 삼위일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3. PDCA(Plan-Do-Check-Action)를 싫어하는 느림보가 이룬 위업

- recurrent(회귀): 인간답게 살았던, 그 옛날 좋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  

- 다빈치의 수태고지: 1472년경, 우피치 미술관 소장 => 먼 산을 흐릿하게 그려 거리감 표현(원근법)

* 다빈치는 손이 느려 기록과 계약을 중시하던 피렌체를 탈출, 프레스코화 대신에 템페라 기법으로 벽화 그림

 

ROOM 2 가난을 완강히 거부한 플랑드르

 

1. 해운업의 발전과 또 하나의 르네상스

- 플랑드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 일대로 흔히 저지대 국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는 바닷길로 연결

* 당시 프랑스 샹파뉴 랭스(Reims)가 유럽의 남북을 잇는 중심지로 번성: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 하지만 14세기에 번성을 잃음. 육로 대신 배로 바닷길을 열어 대량 수송. 항해술 발달, 풍력 이용, 대형 그림들도 유통 => 북방 르네상스 오픈 

- 얀 반 에이크(1390~1441): 플랑드르의 매우 인기 있는 화가. 아마씨유에 안료를 배합해 물감을 만듦. 유화의 발명으로 덧칠이나 그러데이션 표현이 가능. 얀 반 에이크를 비롯한 플랑드르 화가들은 섬세하고 수준 높은 묘사 능력을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 북쪽에서 발명된 유화 기법이 남쪽 이탈리아로 전해지면서 회화의 역사를 바꿈

* 수태고지: 1434~1436년경,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표현의 세밀함.... 왼쪽 창문에서 빛이 들어옴. 


2. 남북의 연합으로 탄생한 그림과 책

- 얀 반 에이크(1390~1441)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런던 내셔날갤러리 소장. 굉장히 섬세, 금속제 샹들리에의 광택, 아르놀피니의 왼쪽 오렌지는 이탈리아인임을 보여줌. 거울 속에는 얀 반 에이크가 결혼 입회인으로 참석한 것을 보여줌. 거울 위의 글은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왼쪽 창문에서 실내로 빛이 들어옴. => 훗날 네덜란드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에서도 이러한 구도   

- 플랑드르에서 이탈리아로 유화가 전해지고, 반대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캔버스가 전해짐. 이전에는 목판에 그렸음. 배의 돛에 달린 천에서 아이디어 =>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혁신을 가져옴 

* 북쪽의 활판 인쇄술과 남쪽의 종이가 만나 15세기에 책 탄생 => 베스트 셀러 성경 => 활자화로 인하여 유럽 문명 역전. 이전의 중국이나 이슬람 선진 문영을 따라 잡음. 특히 유럽 알파벳은 글자 수가 적고 모양도 단순해 활자로 만들기가 용이 


3. 브뤼헐의 그림에 감춰진 상인들의 한탄

-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1525~1569): 안트베르펜에서 수학 후 이탈리아 가기를 염원, 굳이 알프스를 넘어감. 알프스 풍경을 판화로 남김 => 산 풍경은 당시로서는 놀라움 그 자체 => 풍경화 개척, 농민들의 일상을 많이 그려 농민화가

* 알프스 산맥의 풍경: 판화, 1555년경, 벨기에 왕립도서관 소장

*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1566년경,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 '예수를 낳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떠나는 마리아'라는 성경 주제를 자신의 고향 브라반트의 겨울 무대로 그림. 왼쪽 건물의 인파는 인두세 납부를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있음. 빈곤과 기근과 무거운 세금은 가톨릭 면죄부에 항거한 신교의 등장과 더불어 사람들은 한탄과 분노로 바뀜. 

* 교수대 위의 까치: 1568년, 독일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미술관 소장

=> 신교와 가톨릭의 갈등과 전쟁. 까치는 밀고자를 상징. 밀고나 처형없는 평화스러운 날을 기원. 하지만 가톨릭 국가 스페인의 압정과 탄압에 시달린 북쪽 사람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스페인과 길고 긴 싸움이 시작


ROOM 3 증오를 금융 파워로 바꾼 네덜란드

* 신교와 구교의 전쟁은 점점 독립전쟁으로 변하고, 오랜 전쟁 끝에 독립을 이루어 네덜란드를 건국. 교회라는 거대한 후원자를 잃고 대신 부유한 시민들이 화가들을 지원함으로써 네덜란드 종교화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

 

1. 가난한 나라 상인들에게 번진 새로운 종교와 종교 갈등

- 스페인을 이긴 신교 국가 네덜란드, 스페인을 이기지 못한 가톨릭 국가 벨기에로 분열

* 레이던의 항쟁으로 스페인군대 격퇴, 시민들에 대한 포상으로 레이던 대학 설립

〈야경〉은 렘브란트(1606~1669)의 대표작: 주목할 것은 이전의 그림들처럼 종교화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이나 신화에 관련된 어떤 요소도 없이 그냥 인간의 모습을 그렸을 뿐입니다. 이것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집단 초상화입니다. 이런 그림이 그려진 배경에는 후원자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부유한 부르주아 시민으로 후원자가 바뀐 것이지요.

* 야경: 1642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 배경은 밤이 아니라 낮이고 제목도 렘브란트가 정한게 아님. 그림에 칠한 니스가 후일 검게 변해서 밤을 그린 거라 착각한 사람들이 멋대로 야경이라는 제목을 붙임. 그림 크기가 363x437로 꽤 크다.  


2. 관용의 정신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

- 새롭게 탄생한 네덜란드는 상인들의 나라답게 이렇게 천명. “모든 상인이여, 이 나라로 오라.” 종교 갈등 끝에 세워진 나라니 가톨릭교도들을 미워했을 법도 한데 네덜란드는 달랐습니다. 뜻밖에도 ‘노사이드’를 선언. 이제 더는 종교 문제로 싸우지 말자, 장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종교를 불문하고 환영한다. 이 관용의 선언을 듣고 북부 신교 각 종파, 남부 가톨릭교도,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몰려왔습니다.… 네덜란드는 이민으로 ‘두뇌(인재)’를 불러모았던 것입니다. 이민을 단순노동자로 보는 보통의 시각과는 달랐습니다.

=> 경제적으로 쇠퇴하던 지중해의 왕자 이탈리아를 대신하고, 동인도까지 진출. 바다 위에서 신교와 구교의 전쟁 계속
=> 대선단 구성, 항구 정비로 큰 돈 필요 => 장기적으로 대규모 자금조달 위해 세계 최초로 주식회사 설립, 주식 거래를 위해 증권거래소 설립

* 플로라(꽃의 여신)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 1634년,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과 소장

=> 사스키아는 렘브란트의 아내, 가장 비싼 물건은 머리에 장식한 튤립. 신교도의 사랑을 받던 튤립이 세계 최초의 거품

- 그림의 변화: 후원자는 교회나 왕족에서 시민, 주제는 종교화에서 풍경, 정물, 풍속화, 생산방식은 주문에서 예측 생산. 

- 네덜란드의 금융파워 몰락: 주식, 튤립, 그림 등 상품이 하락세로 전환 => 네덜란드와 렘브란트 몰락


3. 샐러리맨 화가와 프리랜서 화가

- 그림도 내가 만들고 싶은 것에서 시장이 원하는 것을 만드는 시대로 전환: product out => market in, 화가들도 마케팅 센스가 필요. 네덜란드 회화라는 다양성 넘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

-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벨기에 안트베르펜 출신, 호화롭고 감각적인 바로크 회화의 거장, 가톨릭 배경으로 왕에게 봉사하는 월급쟁이 화가 (반면에 렘브란트는 신교 배경의 프리랜서 화가)  

* 삼면 제단화<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1612~1614년경, 안트베르펜 성모 마리아 대성당 소장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간적인 자유로운 표현을 손에 넣었지만, 바로크 시대의 궁정 화가 대부분은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렸어요. 생활의 안정과 화가로서의 자유를 맞바꾼 월급쟁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ROOM 4 혼란 속에서 브랜드를 만들어낸 프랑스

 

1. 이탈리아를 따라잡고 앞질러라!

- 다빈치는 피렌체를 떠나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하다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제안으로 파리행. 파리에서 생을 마감. 그의 명작 모나리자가 루브르 미술관에 걸린 사연.

- 피렌체 로렌초의 딸 카테리나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결혼, 이때 이탈리아 요리, 매너 등 음식문화를 프랑스에 소개. 

- 하지만 특권계급의 사치와 낭비는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시민을 괴롭히는 증세를 단행

-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프랑스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수학 후 그곳에 정착, 당시 바로크 전성기였지만 푸생은 고요하고 철학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그림을 그림, 그림은 단정하고 이성적이었다.  

*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1638~1640년, 루브르 미술관 소장. 고귀하고 지적인 분위기  

- 프랑스 상류층이 이탈리아 그림을 구입하면서 엄청난 돈이 유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카데미 설립. 도제제도 대신에 예술가를 교육하는 기관을 설립. 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전시회 살롱을 통한 작품 발표  


2. 귀족들의 사치에 폭발한 프랑스혁명

-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 아카데미 출신 의 대표 화가, 

* 점심: 1739년, 루브르 미술관 소장,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 주제가 일상이며 왼쪽 창에서 들어오는 빛은 얀 반 에이크를 연상.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하고 온화. 르네상스 회화처럼 웅장하지도, 네덜란드 회화처럼 너무 사실적이지도 않은 그림.  화가의 길은 모방 -> 반발 -> 독창이라는 경로를 걷는 것

* 퐁파두르 부인: 1756년, 독일 뮨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로코코 회화의 대표작, 굉장히 우아하고 마치 순정만화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 이것이 로코코의 특징으로 귀족 취향. 결국은 재정 파탄. 프랑스 재무장관 실루에트는 공기세 고려. 장관은 비싼 초상화 대신 검은 종이를 잘라 인물의 옆모습을 표현하는 저렴한 방법을 선호했는데 이에서 실루엣 기원.

2% 특권층(왕족, 귀족, 성직자)의 사치는 98% 시민들에 의해 유지 =>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


3.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 인근 국가들의 혁명정부 압박 => 나폴레옹 등장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 활발한 정치 활동, 신고전주의의 직선적이고 딱딱한 그림

*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1년, 루브르 미술관 소장. 실제로는 나귀를 타고 넘어갔는데 백마로 바꾸어 웅장하고 다이나믹하게 표현. 나폴레옹은 여러 점을 그리게 하여 여기저기 걸어두었다고 함. 

- 나폴레옹, 회화를 공공재화하다: 프랑스혁명 후의 혼란기에 황제에까지 오른 나폴레옹, 그는 약탈해온 다른 나라의 미술품을 아직 궁전으로 사용 중이던 루브르에 보관. 이렇게 전쟁의 혼잡 속에서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미술품이 프랑스로 유입. => 나폴레옹이 이 미술품들을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공개. …… 다비드가 주도해 루브르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 이때부터 회화는 사적 소유물이 아닌 공공재로서의 성격 => 미술사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 
-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 도시에서 시골로 돌아간 농민 화가.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에서 자연이 풍요롭게 펼쳐진 농촌의 공기에 눈을 뜨고 수많은 명작을 그려냄. 

* 만종: 1857~1859, 오르세 미술관 소장, 황혼 녘에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 따뜻함, 여타 종교화와는 다른 분위기,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된 그림, 밀레의 신념이 느껴짐. 노동의 고귀함과 삶의 기쁨. 원래는 보스턴에서 주문 받았으나 인수하지 않아 1,000프랑 헐값에 매각. 이후 미술시장에서 80만 프랑까지 상승.   

- 이웃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공장의 대규모화가 진척. 프랑스는 농업이 발전하여 미식의 나라로 탄생, 그리고 가내 수공업의 작은 기업들이 전문업체로 성장하여 개성있고 매력적인 브랜드 탄생. 

- 프랑스 회화 역사에서 혁명 이전을 로코코, 이후를 신고전파로 구분. 


ROOM 5 반항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프랑스

-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의 등장, 거의 비슷한 세대로 서로 어울리면서도 경쟁. 아카데미와 살롱 시스템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체제에 대한 반발. 

 

1. 반항아가 후배 화가들에게 보인 모범

- 1494년 프랑스는 여러 나라에서 용병을 동원하여 이탈리아 나폴리를 공격, 전후 용병들이 귀국하면서 매독(프랑스병)을 전파. 가톨릭의 평생 독신을 위한 창가가 필요. 귀족용 고급창부, 가난한 화가는 창부를 모델로 고용. 

-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매독으로 인한 괴저로 왼 다리 절단   

* 올랭피아: 당시 창부를 통칭하는 이름, 1863, 오르세 미술관 소장. 프랑스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창부를 누드로 그렸다는데 대한 비난. 마네는 티치아노가 그린 로마 신화의 비너스를 창부로 바꾸는 도발을 일으켰다.   

* 우르비노의 비너스: 베첼리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 1538년경, 우피치 미술관 소장

* 제비꽃 장식을 한 여인, 베르트 모리조: 에두아르 마네, 1872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와 모리조의 연인관계설, 하지만 이 그림 직후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과 결혼. 


2. 가난한 화가들, 자유로운 영혼의 행방

- 마네를 이은 반항아들, 모네, 바지유, 르누아르 등 인상파 작가들.

* 라 그르누이에르: 모네(Claude Monet), 186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물감을 섞지 않고 색을 찍어그리는 새로운 화법으로 수면을 표현 (필촉분할기법). 

- 병상의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 1841~1870), 1865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모네가 다리를 다쳐 우울해할 때 거동이 힘든 그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음. 바지유는 보불 전쟁에 참전하여 향년 28세에 전쟁터에서 사망. 당시 신혼이었던 모네는 병역을 피해 런던으로 도망. 


3. 돈 버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는 와중에 제1회 그룹 전시도 패배의 아픔을 피하지 못했다. 한 평론가가 낙서가 더 낫다며 대충 그린 인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 인상이란 말을 차용하여 화가 그룹(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등)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 '인상, 해돋이': 모네, 1872년,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영국해협을 접하고 있는 르아브르의 항구가 그려져 있음. 저 멀리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굴뚝, 19세기 공업화의 여명 

 

- 부르주아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마케팅 정신: 인상파 반항아들 가운데 가장 빨리 출세한 이가 르누아르였어요.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던 그는 일부러 동료들과 거리를 두고 살롱에서 인기 있는 인물화를 그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죠.

-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

*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의 초상': 187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그림을 주문한 샤르팡티에 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애완견과 이국적인 인테리어, 보석 등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 초상화에는 이제 종교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부르주아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마케팅 정신만 있을 뿐입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르누아르였지만,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반항심 넘치는 이 화가는 더는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았습니다. 

 

* 선상 파티에서의 오찬: 1881년, 필립스 컬렉션 소장. 산업화 시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생활 속에서 그 불안감을 떨쳐버리는 듯 젊은 남녀는 몽마르트 술집에서 만나 사랑을 이야기하고 주말이면 교외로 소풍을 갔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주말을 즐기는 풍경이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든다. 

 

* 알린 샤리고의 초상: 1885년경,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르누아르는 40세에 이탈리아 여행. 알린과의 사실상 신혼여행. 생활력이 강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인. 잿빛 작업복을 입은 젊은 여공 출신(그리제트).


ROOM 6 기술혁신의 불안을 극복한 영국

 

1. 문화 후진국 영국에 불어온 미술 광풍

- 그랜드 투어: 영국의 양가 자제가 이탈리아로 떠난 유학 여행. 파리->밀라노->피렌체->로마->베네치아.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졸부가 되었지만 문화 수준이 높은 이탈리아에 대한 열등감. 여행의 마무리는 베네치아, 하여 여기서 선물을 준비하는데 가장 인기 선물은 풍경화. 특히 카날레토 작품. 

- 카날레토(Canaletto, Giovanni Antonio Canal): 1697~1768. 

* 대운하에서의 곤돌라 경주: 1732년(1740년?), 영국 왕실 소장

- 나폴레옹 전쟁 시절 많은 유럽인들이 영국에서 그림 매각하며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 시작

- 존 줄리어스 앵거스타인(1735~1823): 은행가로 오래된 그림 수집 및 예술가 후원. 사후 그의 컬렉션은 국가 소유가 되었고 공개 전시를 위해 설립한 것이 내셔날갤러리. 

* 존 줄리어스 앵거스타인, 55세 무렵: 토머스 로렌스 경, 1790년, 런던 내셔날갤러리 소장. 빚 탕감에 대한 감사의 마음. 

2. 산업혁명의 빛과 그림자

- 조지프 말로도 윌리엄 터너(1775~1851): 베네치아에 큰 영향을 받음, 44세때 처음 이탈리아 여행. 고전을 중시한 나머지 지나치게 엄격, 진지, 합리적인 신고전파에 반발해 자유를 요구하며 나타난 것이 감수성이나 주관을 중시하는 낭만파. 이탈리아 여행 후 빛과 공기를 그리기 사작한 그의 그림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화. 

* 베네치아를 그리는 카날레토: 1833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소장

*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그레이튼 웨스턴 철도: 1844년, 런던 내셔날갤러리 소장. 새롭게 등장한 증기기관차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림. 왼쪽 아래 강에 희미하게 떠 있는 배와 대비, 오래된 탈것과 새로운 탈것. 슬쩍 역사를 그러넣는 것이 터너 그림의 정수. 기관차를 둘러싼 대기의 소용돌이는 추상적인 느낌 제공. 이 부분이 나에게 보이는 대로의 모습을 담는 낭만파 적인 표현. 기관차에 쫒기는 산토끼를 그려넣었는데, 시간과 효율에 쫓겨 불행해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산토끼로 표현한게 아닐까. 당시 유아사망률이 높아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15세. 노동환경과 도시 위생상태가 나빠 유아의 절반 정도가 5세까지 밖에 살수 없었다. 

-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 영국의 선구적인 풍자화가. 호가스는 독창적인 영국 미술가 가운데 한 명으로 상류 사회의 사람들과 그 시대의 병폐를 풍자했다. 그의 작품 '매춘부의 편력'은 인기가 높아 많은 표절이 있었기에 호가스는 '판화가의 저작권 법령'의 제정을 통과시키기까지 하였다.

* 진(gin) 거리: 1751년, 영국 박물관 소장. 무대는 런던의 이스트엔드인데 일자리 잃은 사람들이 모이는 빈민가. 창부가 술에 취해 아기까지 떨어뜨리고, 다리에는 매독 상처. 싸구려 술 진으로 인한 알코올 중독이 사회적으로 문제. 오른쪽 그림은 아기에게 술을 먹이는 끔직한 모습. 


3. 기술혁신과 시장의 변화를 극복하다

- 윌리엄 터너의 그림 2점이 도난, 8년후 무사히 돌아감. 

* 빛과 색채(괴테의 이론): 대홍수 이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 1843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소장.

* 그림자와 어둠: 대홍수 날의 저녁. 1843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소장.

- 영국의 금융 발전으로 그림을 금융자산으로서 유통되기 시작. 미술에도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이 존재

- 카메라의 등장으로 화가들은 미래의 공포를 인식. 윌리엄 터너는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색채를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가 중요과제. 이러한 태도에 인상파 화가들도 큰 용기를 얻음  

-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bastiano del Piombo): 라자로의 부활 => 내셔날갤러리 작품번호 1번. 500년이 넘은 작품, 하지만 선명한 색채.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 죽어서도 살 것이다' 라는 주제. => 터너에 영향. 신기술(카메라와 사진, 물감)과 미술시장의 변화라는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는 경우.   

 

ROOM 7 금욕과 탐욕에서 이익을 낳은 미국

 

1. 아메리카 대륙에 온 양극단의 사람들

- 유럽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신교(네덜란드, 독일, 영국) 대 돈 못버는 가톨릭(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 1519년 스페인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 아즈텍 왕국 정복

- 1619년 필그림 파더스라는 금욕적인 영국인들 북미 상륙 => 경제적으로 성공

* 이후 성실한 노동자들이 미국 동부 해안에 속속 상륙. 대표적인 지역이 보스턴. 신교도가 많았던 이 지역 시민들은 밀레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 오늘날에도 보스턴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충실한 밀레 컬렉션으로 유명. 밀레의 그림이 조국 프랑스가 아니라 보스턴에서 먹힌 이유, 그것이 핵심입니다. 보스턴 정착민들은 밀레의 농민화에서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본 것이겠지요. 밀레는 가톨릭이었지만, 이탈리아식 종교화는 신교도들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밀레의 키질하는 사람: 1847~1848년경, 런던 내셔날갤러리 소장. 1848년 살롱에 출품되어 높은 평가 받은 작품으로 밀레 농민화의 근원. 하지만 1972년 뉴욕 교외의 한 저택 헛간에서 발견. 

- 화가들이 주로 미술상과 파트너십을 체결, 미술상들이 고객 찾아나섰으며, 그림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이동.

* 성한 케이스 프랑스의 미술상 폴 듀랑뤼엘(1831~1922): 르누아르가 초상화 그림(1910, 개인소장). 인상파 회화 미국 소개

 

2. 욕심과 기부 정신이 양립하는 미국의 불가사의

- 미국인들이 인상파 회화를 선호한 이유: 미국의 막대한 부가 창출되면서 그들의 열등감은 문화 역사가 미천하다는 것.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문화를 동경했으며, 르네상스나 바로크 회화와 달리 인상파 회화는 위작이 적었기 때문. 

- 에드가 드가 '뉴올리언스의 면화거래소': 1873년, 파리 포 미술관 소장

- 토머스 힐 ' 마지막 스파이크 1869': 1869년, 캘리포니아 주립철도박물관재단 소장 


3. 그림을 보는 것과 시야를 넓히는 것
- 회계사는 3년정도 중기경영계획을 보는것이지만 그림을 보면 시야를 넓힌다. 

- 어느 미술상이 일본기업들에게 인상파 그림들을 다수 판매. 왜? 일본 기업들이 거품 실적이므로 매수한 미술품을 곧 다시헐값 매각을 예측. 하여 결국 헐값에 재매수. 

-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1886~1957): 프랑스 국비유학, 파리 생활중 차별에 떠남. 멕시코의 어두운 역사를 옛 영광과 함께 드러냄. 그 수단으로 벽화. 소수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 디트로이트 산업, 1932~1933년, 디트로이트 미술관.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 자동차 공장 해고, 흑백 차별. 하지만 그림은 픽션으로 희망을 표출.  

* 멕시코 역사: 1929~1935년, 멕시코 국립궁전  

* 부인 프리다 칼로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선 자화상': 1932년, 개인소장

 










 

교보문고 책 소개

당신의 교양을 단숨에 업그레이드할
경제사의 흐름이 보이는 유럽 미술 투어
세계사와 경제사는 물론 미술사까지 한 번에!
- 명화로 쉽고 재미있고 빠르게 이해하는 경제 교양서

역사를 잘 몰라도,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경제 까막눈이어도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명화 속 경쾌한 ‘경제’ 이야기.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재미있는 회계 강의로 유명한 현직 회계사인 저자답게 편안하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어렵게 느껴지던 세계사와 경제사는 물론 미술사의 주요 흐름을 쉽고 재미있게 들려준다.
중세 이탈리아에서부터 현대 미국까지 가난과 역병, 전쟁, 혁명의 위기와 불안을 극복해온 각 나라의 경험은 물론, 화가들의 반전 있는 마케팅 전략같이 생각지 못한 미술과 관련된 경제 이야기가 경쾌하게 펼쳐진다.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듯 명화에 담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수없이 많은 위기를 되풀이해온 역사 속 인간의 다양한 경제 활동과 명화에 담긴 사람들의 욕망과 지혜에서 불안의 시대를 살아나갈 용기와 희망을 찾아볼 수 있다.

작가정보

田中靖浩
1963년 일본 미에현 요카이치시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후 외국계 컨설팅 회사 등을 거쳐 현재 다나카공인회계사사무소 소장으로 있다. 비즈니스 스쿨과 기업 등에서 회계, 경영 컨설턴트 전문 강사로 활발히 활동하는 한편, 만담가 등과 함께하는 이벤트 강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2시간 만에 감잡는 왕초보 회계》, 계의 《숫자 1도 모르는 당신이 마케팅 천재가 되는 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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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최인영

출판사에서 역사책을 만들고 있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찾아 번역했다.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했고, 편집자가 되기 전에 한중일공동역사편찬위원회 한국 사무국에 근무하며 일본어 통·번역을 했다.

목차

  • 프롤로그 : 흑사병과 르네상스, 그리고 희망

    ROOM 1 흑사병과 불황을 극복한 이탈리아
    1. 교회의 종교화는 중세의 파워포인트
    2. 다시 일어선 피렌체의 기적
    3. PDCA를 싫어하는 느림보가 이룬 위업

    ROOM 2 가난을 완강히 거부한 플랑드르
    1. 해운업의 발전과 또 하나의 르네상스
    2. 남북의 연합으로 탄생한 그림과 책
    3. 브뤼헐의 그림에 감춰진 상인들의 한탄

    ROOM 3 증오를 금융 파워로 바꾼 네덜란드
    1. 가난한 나라 상인들에게 번진 새로운 종교와 종교 갈등
    2. 관용의 정신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
    3. 샐러리맨 화가와 프리랜서 화가

    ROOM 4 혼란 속에서 브랜드를 만들어낸 프랑스
    1. 이탈리아를 따라잡고 앞질러라!
    2. 귀족들의 사치에 폭발한 프랑스혁명
    3.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

    ROOM 5 반항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프랑스
    1. 반항아가 후배 화가들에게 보인 모범
    2. 가난한 화가들, 자유로운 영혼의 행방
    3. 돈 버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ROOM 6 기술혁신의 불안을 극복한 영국
    1. 문화 후진국 영국에 불어온 미술 광풍
    2. 산업혁명의 빛과 그림자
    3. 기술혁신과 시장의 변화를 극복하다

    ROOM 7 금욕과 탐욕에서 이익을 낳은 미국
    1. 아메리카 대륙에 온 양극단의 사람들
    2. 욕심과 기부 정신이 양립하는 미국의 불가사의
    3. 그림을 보는 것과 시야를 넓히는 것

    에필로그 : 시공을 초월한 용기의 바통
 

출판사 서평

미술과 역사, 경제가 무슨 관련이 있냐고요?
- 명화에 담긴 흥미진진한 경제 이야기

십자군 전쟁으로 동서 교역로가 열린 먼 옛날 인간의 활발한 경제 활동이 시작되었지만, 그로 인해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덮쳤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으로 당연히 경제도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법!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부유한 패트런(후원자)과 교회, 예술가 들이 힘을 합쳐 흑사병과 경제 위기의 끝에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세계사의 주요 사건을 징검다리 삼아 명화를 들여다보며 당대 사회와 경제의 모습을 살핀다. 가난을 거부하고 북방 르네상스를 이뤄낸 플랑드르 지방, 기나긴 종교전쟁이 남긴 증오를 금융 파워로 바꾼 네덜란드, 프랑스혁명의 혼란 속에서 자신들만의 시장을 개척한 프랑스, 특출난 사업 머리로 기술혁신의 불안을 극복한 영국 그리고 금욕과 탐욕에서 이익을 낳은 미국 등 사회 혼란과 경제 위기를 극복한 나라들의 이야기에서 사회와 경제, 미술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는지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교회나 왕족의 주문품이었던 그림이 시민의 것(공공재)이 되고 시장에 유통되는 상품이 되어 결국에는 금융자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회화의 경제사적 변화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설명하는 점도 흥미롭다. 또 해운업의 발전에서 혁신적인 회화 기법의 탄생 비화를, 다빈치의 〈수태고지〉에서 ‘3월 24일 결산’의 의미를,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세계 최초 거품 경제의 주인공을 찾는 등 ‘미술’과 ‘경제’의 다리를 이으면 비소로 보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경제사를 더욱 친근하게 접할 수 있다.

피렌체의 비즈니스에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실권을 거머쥔 메디치 가문은 로마 교황에게도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 교황 역시 메디치 가문과 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흑사병 이후] 교회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지요. …… 로마 교회와 메디치 가문이 손잡고 교회를 개·증축하거나 장식할 조각, 회화 제작에 힘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재정적 뒷받침을 한 메디치 가문 같은 상인과 권위 회복을 꾀한 교회, 혁신적인 창작을 시도한 예술가들, 이 삼위일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ROOM 1 흑사병과 불황을 극복한 이탈리아〉 중에서(36~37쪽)

얀 반 에이크는 오늘날 플랑드르 지방에서 매우 인기 있는 화가입니다. 이탈리아 회화에까지 영향을 준 그는 그야말로 ‘우리 지역의 자랑’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는 어떻게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신기술의 발명이 있었습니다. …… 유화의 발명으로 덧칠이나 그러데이션 표현이 가능해졌고, 얀 반 에이크를 비롯한 플랑드르 화가들은 섬세하고 수준 높은 묘사 능력을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 북쪽에서 발명된 유화 기법이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회화의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ROOM 2 가난을 완강히 거부한 플랑드르〉 중에서(56~57쪽)

〈야경〉은 렘브란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 주목할 것은 이전의 그림들처럼 종교화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이나 신화에 관련된 어떤 요소도 없이 그냥 인간의 모습을 그렸을 뿐입니다. 이것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집단 초상화입니다. 이런 그림이 그려진 배경에는 후원자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부유한 부르주아 시민으로 후원자가 바뀐 것이지요.
-〈ROOM 3 증오를 금융 파워로 바꾼 네덜란드〉 중에서(86쪽)

새롭게 탄생한 네덜란드는 상인들의 나라답게 이렇게 천명합니다. “모든 상인이여, 이 나라로 오라.” 종교 갈등 끝에 세워진 나라니 가톨릭교도들을 미워했을 법도 한데 네덜란드는 달랐습니다. 뜻밖에도 ‘노사이드’를 선언한 겁니다. 이제 더는 종교 문제로 싸우지 말자, 장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종교를 불문하고 환영한다고 했지요. 이 관용의 선언을 듣고 북부 신교 각 종파, 남부 가톨릭교도,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몰려왔습니다. …… 네덜란드는 이민으로 ‘두뇌(인재)’를 불러모았던 것입니다. 이민을 단순노동자로 보는 보통의 시각과는 달랐습니다.
-〈ROOM 3 증오를 금융 파워로 바꾼 네덜란드〉 중에서(88~89쪽)

프랑스혁명 후의 혼란기에 황제에까지 오른 나폴레옹, 그는 …… 약탈해온 다른 나라의 미술품을 아직 궁전으로 사용 중이던 루브르에 보관했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혼잡 속에서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미술품이 프랑스로 유입되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후 나폴레옹이 이 미술품들을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했다는 것입니다. …… 다비드가 주도해 루브르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했습니다. 이때부터 회화는 사적 소유물이 아닌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미술사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ROOM 4 혼란 속에서 브랜드를 만들어낸 프랑스〉 중에서(130쪽)

경제사의 시각으로 보는 화가들의 색다른 면모
- 유명 화가들의 반전 있는 마케팅 전략

누구나 다 아는 유명 화가들의 삶도 ‘경제’의 눈으로 보면 의외의 모습들을 찾아낼 수 있다.
피렌체의 꼼꼼함이 싫어 고향을 떠난 손이 느린 다빈치와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월급쟁이 화가들의 왕이 된 루벤스, 화가로서 자존심은 지켰지만 ‘마켓 인’으로의 시장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렘브란트 등 천재 화가들의 반전 있는 모습은 놀라움과 동시에 헛웃음을 자아낸다. 반면, 먹고살기 위해 부르주아 고객들을 만족시킨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 화가를 위협하는 카메라의 등장에 인간만이 가능한 능력으로 당당히 맞선 윌리엄 터너, 먼 아메리카 대륙 구매자의 ‘니즈’를 날카롭게 파악한 농민 화가 밀레 등과 같이 알려진 모습과 달리 강인한 정신력으로 탁월한 마케팅 전략을 펼친 화가들의 색다른 면모도 만날 수 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고민하고, 좌절하고, 노력하고, 극복하는, 지금의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는 경제 위기 속 작은 위로와 응원으로 다가온다.

어딜 가나 천재 소리를 듣는 다빈치이지만 다른 화가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으니, 손이 너무 느렸습니다! 어느 시대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신뢰받지 못했지만, 다빈치가 피렌체에 살았던 당시는 특히 ‘계약’이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부기를 만들어낸 메디치 가문이 권세를 누리던 지역이었으니 더 그러지 않았겠어요? 상인들은 장부를 세세히 적고 결정 사항들은 모두 계약서로 남겼으며, 정부는 가문이나 개인의 재산을 집요하게 조사해 기록했지요. 그렇게 기록과 계약을 중시하던 피렌체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다빈치에게는 불행이었던 것 같아요.
-〈ROOM 1 흑사병과 불황을 극복한 이탈리아〉 중에서(39~40쪽)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간적인 자유로운 표현을 손에 넣었지만, 바로크 시대의 궁정 화가 대부분은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렸어요. 생활의 안정과 화가로서의 자유를 맞바꾼 월급쟁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루벤스는 월급쟁이들의 경쟁에서 이겨 사장이 되고, 경제 단체 회장까지 올라간 격이었어요. …… 그에 비해 신교국가의 화가 렘브란트는 월급쟁이가 아닌 프리랜서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프리랜서는 비교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데 비해 생활이 안정적이지 않잖아요. 안정이냐 자유냐, 당시 화가들도 지금의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ROOM 3 증오를 금융 파워로 바꾼 네덜란드〉 중에서(101~102쪽)

인상파 반항아들 가운데 가장 빨리 출세한 이가 르누아르였어요.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던 그는 일부러 동료들과 거리를 두고 살롱에서 인기 있는 인물화를 그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죠.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의 초상〉에서는 그림을 주문한 샤르팡티에 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애완견과 이국적인 인테리어, 보석 등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 초상화에는 이제 종교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부르주아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마케팅 정신만 있을 뿐입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르누아르였지만,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반항심 넘치는 이 화가는 더는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았습니다. -〈ROOM 5 반항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프랑스〉 중에서(161, 164쪽)

영국은 생산 기술의 진보를 통해 그 단점을 뛰어넘어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또 영국인들은 기술을 사업화하는 파이낸스(자금 조달) 기술도 갖고 있었지요. 이 파이낸스 분야의 지식이나 인재가 미술 시장에 들어오면서 그림은 금융자산으로서 유통되기 시작합니다. …… 산업혁명의 혜택에서 제외된 화가들에게 새로운 시련이 덮쳤습니다. 카메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카메라는 화가들을 둘러싼 환경을 빠르게 변화시켜 그들의 미래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많은 화가가 카메라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까봐 두려워했어요. …… AI(인공 지능)의 등장으로 일자리가 사라질 것을 걱정하는 21세기 사람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ROOM 6 기술혁신의 불안을 극복한 영국〉 중에서(198~199쪽)

필그림 파더스 이후 성실한 노동자들이 미국 동부 해안에 속속 상륙했습니다. 대표적인 지역이 보스턴입니다. 신교도가 많았던 이 지역 시민들은 밀레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보스턴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충실한 밀레 컬렉션으로 유명하지요. 밀레의 그림이 조국 프랑스가 아니라 보스턴에서 먹힌 이유, 그것이 핵심입니다. 보스턴 정착민들은 밀레의 농민화에서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본 것이겠지요. …… 밀레는 가톨릭교도였지만, 이탈리아식 종교화는 신교도들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ROOM 7 금욕과 탐욕에서 이익을 낳은 미국〉 중에서(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