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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아츠앤트래블님 해설 1부 (2023.8.6)

클리오56 2023. 8. 6. 07:49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중인 내셔날갤러리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와 관련하여

아츠랜트래블님의 TOP 10 해설 소개를 정리하였다. 

전문가의 말씀 하나하나를 따라 듣고 읽다보면 좀 더 회화 감상에 접근할 수 있겠다 생각하여

무리하여 세밀하게 정리하였다. 

이를 정리하던 중 아츠앤트래블님은 2부와 3부를 추가하였으니

이를 온전히 소화하여 혹은 그 전이라도 일단 한번 직접 감상하러 갈 계획이다. 

1. 카라바조: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린 소년

아츠앤트래블님의 해설:

- 카라바조는 바로크 미술 자체를 시작하고 그리고 대표하는 화가라고 보실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분이 굉장히 삶이 아주 다이내믹하다. 정말 굉장히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성스러운 삶을 추구하기도 했었는데 사실 타고난 폭력성과 광기가 굉장히 강하였다. 그래서 결국에는 말년에 살인을 저지르고 그림도 잃어버리고 아주 비참하게 객사한 그런 비운의 화가였다.

- 카라바조의 예술적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보통 어둠과 빛을 통해서 극과 극을 오가는, 그러니까 어둠과 빛을 굉장히 강조한다. 대비효과를 아주 세게 주는 거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성스러움과 세속스러움을 동시에 담아낸다.

- 도마뱀에게 중지를 물려서 깜짝 놀라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의 어떤 부분에서 그의 혁신을 찾아볼 수가 있느냐면 물병을 한번 보시게 되면 어두운 방안에서 살짝 창문이 열려 있는 모습을 보실 수가 있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서 빛이 쏘아져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그 모습을 보실 수가 있는데, 즉 어두운 방 안에서 카라바조가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리고 의도적으로 살짝 열어서 그 틈으로 아주 강한 광선을 만들어서 지금 모델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 그림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이를 테네브리즘이라고 하는데 중심 인물한테 빛을 굉장히 강하게 비춰줘서 그림에다가 더욱 집중시키는 방법이라고 보실 수가 있고, 이 빛과 그리고 어두운 영역의 그림자 부분을 가지고 그 사이에서 굉장히 강한 효과를 주면서 이 주인공의 어떤 내면 감정적인 부분을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라는게 바로 이 카라바조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니까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을 어떻게 표현할까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가지고 들게 나온 것이 바로 테네브리즘이다. 빛과 어둠 그것을 극명한 대조를 만들어 내면서 현대 시대의 핀조명을 쓰고 있다. 현대적으로 얘기하면 그런 방법으로 내면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었던 예술가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느와르 영화(범죄나 사회적 윤리 같은 소재를 사용해 어두운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작품군을 칭하는 장르) 같은데 보면은이 기법이 자주 사용된다. 어둠 속에서 갱스터 같은 사람들이 그 얼굴에 빛이 살짝 드리우면서 대화를 한다든지 그런 장면에서 많이 차용이 되고 있는데 마틴 스코세이지(아이리시맨, 좋은 친구들과 같은 느와르 영화 많이 만들었던 세계적인 감독)는 본인 인터뷰에서 카라바조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라고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게 무슨 의미냐면 카라바조는 조명의 중요성을 이미 400년 전에 파악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조명의 물병을 통해서 보면은 의도적으로 문틈을 살짝 열어서 엄청나게 강렬한 햇살을 그 문틈 사이로 광선을 만들어서 주인공을 비추고 있는 의도적으로 조명을 400년 전에 만들어서 그림을 그렸었던 예술가다라고 보실 수가 있죠. 대단한 거죠, 굉장히 혁신적인 당시에는 아예 없던 방식의 그림이었다. 커라바조의 초창기에 그의 예술적 특징이 막 나오던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번에 우리 국내에 들어오게 된다라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전 세계 60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초창기를 대표하는 카라바조의 초기 작품들이 또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많지가 않아요. 카라바조가 뒷골목을 막 전전하면서 살았었던 어렸을 때는 그런 예술가라 어린 시절의 기록도 많지 않고요,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희귀한 이 작품을 여러분들이 이번 전시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시면은 보실 수가 있다라는 것이다.

 

 

2. 렘브란트: 63세 시기 자화상

 

렘브란트 (출처: 나무위키)

1. 개요

"나를 렘브란트와 비교하다니! 정말 신성모독이다! 예술의 거인 렘브란트! 우리는 렘브란트 앞에 엎드려야 하며 절대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오귀스트 로댕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임은 물론, 유럽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다. 자의적으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능숙하게 사용한 스타일이 특징이며, 정교한 구도와 인물의 탁월한 묘사로 오묘한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던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2. 생애

레이던에서 제분업자의 9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공식적으로는 개신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는 레이던 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일찌감치 예술에 두각을 보이기 시작해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624년에 고향인 레이던으로 돌아와서 아틀리에를 열었다. 한동안은 독학으로 친척이나 이웃 노인, 성경 등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다가 초상화가가 되어 화가로써 자리잡게 된다. 렘브란트는 카라바조 등 이전 시대의 화가에게서 영향을 받아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주어 극적인 화면을 만드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의 국가와 다르게 왕이나 귀족이 아닌,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 계급이 태동하던 나라였으며 성공한 상인들을 위한 초상화의 수요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빛과 그림자를 능숙하게 다루며 인물에 대한 극적인 묘사를 보여주던 렘브란트도 점차 인기를 얻게 된다.

 

1632, 암스테르담 의사협회에게 의뢰받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La leçon d'anatomie du docteur Nicolaes Tulp)>가 호평을 받으면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되었다. 흔히 해부학 강의로 줄여부르는 이 걸작은 소재 자체는 당대에도 여러번 그려진 적이 있으나 렘브란트처럼 인물들을 극적으로 배치시키고 생생한 표정을 담아낸 작품은 없었다. 훗날 1656년에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했을) 렘브란트가 유사한 소재의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다시 그렸던 것을 보면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때부터 10년간은 렘브란트의 생활이 가장 빛나던 때였다. 명문가의 딸이었던 사스키아 판오이렌부르흐와 결혼했고,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 많은 의뢰를 받았고 제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렘브란트 자신의 화풍이 성숙하면서 평면적인 초상화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점차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종교적/신화적인 소재를 따서 그리거나, 자화상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세속적인 성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 결정타는 바로 1642년에 완성한 명작인 '야경'이었다. 이는 암스테르담 자경단 협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렘브란트는 당시의 기념사진 같은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해, 명암효과를 주는 식으로 대담한 구성을 시도했으나 혹평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같은 돈을 냈는데 누구는 주인공처럼, 누구는 배경처럼 묘사되어서 당대의 그림 구조와 크게 어긋났기 때문. 마치 빛나는 여인처럼 보이는, 렘브란트 부인인 사스키아에 대한 자의적인 묘사도 혹평 받는 요소였다.

 

보통은 이렇게 알려졌었으나, 렘브란트가 야경을 그린 후 단원중 하나인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가 찾아와 자신의 초상화와 야경의 수채화 모작을 부탁하였다. 위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는 자경단원들이 야경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혹평을 퍼뜨린 것으로 나타났으나... 그랬다는 사실은 없으며, 단순히 몰락한 시기와 맞아 떨어진 것에 대한 추측이다. 렘브란트가 몰락한데는 당시 사스키아의 죽음에 관련되 있는데, 사스키아가 죽게되면서 경제적부담이 커지고 당시 아트 컬렉터들이 밝고 화사한 그림 (예를 들어 로코코 시대 작품)을 선호하며 인기가 떨어진것이 몰락의 이유다. 참고로 모사도를 보면 원래 이 작품은 더 컸었는데 이 그림이 걸려있던 건물이 개축되면서 놓을 장소가 없어 그림 일부를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 그 잘린 부분이 어땠는지는 모작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당시 이 그림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당시 건물크기가 작아 자른 것도 있으며 작품을 일부 잘라내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물론 현대에는 불멸의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더군다나 같은 해에 아내인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2번째 아내인 헨드리키의 내조를 받아 작품세계가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렘브란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1640년대 이후에 완성되었다. 화가로서의 명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생활이 사치스러웠던 탓에, 생활이 가면 갈수록 어려워져서 1656년에는 파산선고를 받고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저택과 미술품마저도 전부 팔아야 했다. 하지만 사후 네덜란드 정부가 발벗고 나서 렘브란트가 팔아치워야 했던 미술작품 120점가량의 대부분을 사들여 렘브란트의 생가에 전시해놓는다. 그중에는 루벤스와 같은 거장의 작품들도 많다고. 한때는 정말 잘나갔던 듯(전에도 말했지만 사스키아가 죽으며 렘브란트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을 정도로 사스키아는 큰 경제적 버팀목이 되었다. 사스키아가 경제력이 컸다는 것은 그녀의 결혼 지참금을 통해서 알 수있는데 4만길더로 약 한화 40억원...). 1662년에는 헨드리키도 세상을 뜨고, 1668년에는 사스키아의 사이에서 본 아들인 티투스마저 세상을 뜨면서 렘브란트도 1669, 유대인 구역의 허름한 집에서 눈을 감았다.(참고로 그는 유대인이 아니다. 다만 유대인 친구가 많고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낸 편).

 

렘브란트는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화가로,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었고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자화상을 무척 많이 그린 화가였는데, 100점 이상을 남겼다고 하며, 죽은 해인 1669년에도 자화상을 남겼다;

 

3. 종교관

종교화를 그릴때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성경 인물 혹은 순교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나약한 듯한 모습으로 그릴 때가 많았다. 이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렘브란트 자신이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위 그림도 일반적인 예수 초상화와는 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인데 당시 지인이던 세파르딤 유대인 청년을 모델로 해서 그렸기 때문이다.

 

다만 어머니가 가톨릭이었다는데서 알 수 있듯 단순히 화풍을 갖고 렘브란트를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 확신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의 종교화 중에는 가톨릭 후원자들의 주문을 받아 그린 명백히 가톨릭 화풍의 그림들도 많기 때문에, 하나로 고정된 화풍으로만 그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안재경 목사가 쓴 렘브란트의 하나님이란 책에서는 그가 확실하게 개신교 신자인것처럼 서술해 놓았지만, 신빙성은 좀 낮다. 반면 김학철 교수가 쓴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라는 책에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학술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이쪽을 추천한다. 이 책에서는 그의 신앙관이 주류 칼뱅주의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일단 네덜란드의 국가 교회와 종종 충돌을 겪었던데다가, 그의 후원자 중에는 개신교도도 있고 가톨릭 신자도 있고 유대인도 있었다. 게다가 가톨릭 화가가 스승이다.(렘브란트의 종교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Perlove, Rembrandt's Faith: Church and Temple in the Dutch Golden Age, 2009 참고)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들은 거의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바로크 미술이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에서 유래한 화풍이기 때문이다. 단지 상업국가라 실용주의 성향이 강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개신교 후원자들이나 가톨릭 후원자들을 막론하고 그림을 주문할때 화가의 종교를 딱히 따지지 않는 경향이 강했을 뿐이다.

 

게다가 둘째 결혼을 할 때 원래 연인이랑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다른 여자랑 눈이 맞아 파기하곤 위자료 책임지기 싫다는 이유로 상대 가족을 매수해 정신병원에 보내버리는 등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짓을 했던 점들을 볼 때, 그가 신앙적으로도 독실했다 보긴 힘들 것이다.

 

 

아츠앤트래블님의 해설:

렘브란트의 마지막 시기의 자화상, 제가 내셔널갤러리에 많은 분들 모시고 갔을 때 진짜 광분하면서 작품 하나를 10분 이상 늘어지는데 그 작품이 바로 이 작품 63세 시기의 자화상이다. 제 스스로가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정말 소개해드리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고 그리고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다. 렘브란트의 후기는 다른 화가들이 렘브란트를 화가로도 보지 않았었던 완전히 그냥 한물 두물 세물 잊혀진 그런 화가였었던 시기였고, 그때 그려진 작품이다. 그런데 그때 작품들이 진짜 최고의 작품들이에요. 이 작품에서도 카라바조의 테너브리즘이 좀 있다. 여기 보시면 이런 빛의 효과 같은 거 테너 브리즘이 좀 살아 있습니다. 렘브란트도 카라바조의 스타일, 영향을 받기도 했어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빛과 그림자 이런 대비를 통해서 얼굴이라든지 윤곽 그리고 옷의 질감도 강조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렘브란트의 작품은 좀 더 카라바조보다 깊이가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면서 되게 내밀하고 성찰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런 예술 작품이 바로 이 63세 시기에 자화상입니다. 보통 예술의 궁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예술의 끝은 결국엔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그 인생의 끝에서 있었던 말년의 예술가가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는 그 장면이다라고 보실 수가 있습니다. 

- 17세기 때 네덜란드에 바니타스라는 장르가 유행했었던 적이 있어요. 바니타스는 인생무상, 인생은 덧없다는 내용들을 담은 정물화를 말한다. 정물화를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아무리 탐스러운 과일이든 화려한 꽃이든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그 그림을 그리는 시간 안에 상하고 시들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화가들은 그 모습을 지켜봐요, 그러면서 그 안에서 교훈적 내용이나 이런 것들을 담습니다. 바니타스가 공허라는 뜻이다. 성경 전도서 11절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라는 그 구절에서 비롯된 용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헛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일깨워주는 그런 구절에서 파생된 용어를 가지고 우리가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들을 음미하고 있다라고 보실 수가 있는데 그 과정이 아름다움에서 시들고 사라져가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그 성찰을 찾고 그림을 그렸었다는 것, 이건 되게 제 주관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이 제가 바니타스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자신이 곧 그 정물화의 오브제처럼 자신을 지금 바라보면서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물감을 막 그냥 바르고 붓칠로 하는게 아니에요 막 문지르고 깎고 긁어내고요, 그러면서 이 피부에 표현을 하고요 그리고 머리 이런 표현들 막 긁어서 표현을 하고 팔레트 나이프 같은 걸로 대충 막 찍어 바르고 쓱쓱 바르고 그러면서 물감도 대충 바른 거 같은데 어쨌든 그 색도 별다른 것이 없는 그러면서 피부의 질감이나 이런 것들을 다 표현하고 있어요. 그래서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죠. 눈이 되게 슬프죠. 여러분이 붓질이나 물감을 한 번씩 찍어 바를 때마다 렘브란트의 세월의 무게 같은 것이 보인다라는 것. 렘브란트 그림을 이렇게 이 눈빛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그냥 되게 생각이 잠기게 한다라는 것.

 

- 평생 자화상을 그려왔어요, 특히 말년에 한 80여점 정도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데 그 자화상을 그리면서 렘브란트가 얼마나 거울 앞에 수많은 시간을 서있었겠어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고민과 성찰을 했을겁니다. 그걸 끊임없이 자신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거울을 봤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자기와 대화를 하는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 렘브란트의 그림은 단지 빛이나 이런 피부 표현 이런 것만 보는게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니라 렘브란트의 고민과 고뇌를 감상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죠. 그의 마음을 한번 느껴보는 거죠. 이 그림을 딱 보고 있으면 렘브란트가 어떤 나이를 먹은 모습이 아니라 진짜 그냥 렘브란트가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라는 것이죠. 자화상 중에 최고 맞습니다. 아직도 갑자기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그게 왜 떠오르세요. 벅차오르죠. 윌리엄 터너 영국의 국민화가죠 '렘브란트는 어둠을 완전히 극복한 화가다'라고 이야기했고요. 작가들 중에 화가들 중에 화가라고 하잖아요. 화가들이 가장 존경해요. 그 피카소가 뭐라고 했냐면 '렘브란트 같은 사람들을 진짜 진정한 화가'라고 하는거다, 나는 그에 비하면 광대에 불과하다. 왜냐면 렘브란트는 자기가 표현하고자 했었던 것을 표현했었던 화가죠. 그러니까 어떤 클라이언트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었던 예술가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가난했죠 그래서 그냥 한물간 화가로 잊혀진 화가로 이 세상에서 이름 몇 자 남기고 사라진게 된 것이죠. 그 예수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친 그래서 루치안 플로이드와 같은 그런 예술가들은 그 어떤 내면을 보는 예술가들이 있잖아요 그런 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은 진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완벽하다라고 이야기해요. 프란시스코 고야가 뭐라고 했냐면 '나에게 스승은 자연 그리고 렘브란트다' 이런 말을 하기도 했고요. 뭐 진짜 엄청난 극찬들의 극찬들을 했었던 화가들 중에 화가다라는 겁니다.

 

 

3. 조반니 벨리니 '성모와 아기 예수'

 

 

아츠앤트래블님의 해설:

- 조반니 벨리니는 르네상스 시기에 베네치아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굉장히 그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입니다. 베네치아 화파의 아버지라고까지도 불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베네치아라는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들이라고 한다면 조르조네, 티치아노, 틴토레토 그리고 베로네스와 같은 예술가들이 있는데 조반니 벨리니에게 영향을 받았다라고 보실 수가 있어요. 당시 피렌체는 굉장히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그런 그림들이 많이 나왔었어요, 근데 반면에 베네치아는 색채적인 요소가 중요했었는데 그 시작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조반니 벨리니이다라고 보실 수가 있죠. 그러니까 이 색채 위주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 그러니까 붓칠 위주로 그림을 그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켈란젤로 같은 경우는 되게 형태적인 것에 집중을 했다면, 이 베네치아쪽에서는 이 붓칠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시작점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조반니 벨리니이다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실 수가 있습니다. 

 

- 베네치아가 바닷가에 위치를 하고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대기에 상당히 민감했을거예요. 아마 빛이 좀 다른 도시들과는 상당히 사뭇 달랐을 겁니다. 그 분위기가 아마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았을 거고요. 그리고 이곳이 되게 부유한 항구였었잖아요. 그래서 해외로부터 이렇게 수입되었던 진귀한 물감의 재료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광물들 같은 거 있죠 물감을 만드는 것도 그래서 아주 다채로운 색채를 낼 수가 아마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색채 위주의 그림들이 베네치아에서 나왔죠. 베네치아는 로마, 피렌체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요. 그림에서 성모의 모습을 보시게 되면 파란색 망토 같은 걸 두르고 계시잖아요 이게 바로 라피스 라줄리라고 하는 광물로 만든 색이에요. 울트라 마린 색이라고도 보통 이야기를 하죠. 이 라피스 라줄리가 유럽 전체에서는 되게 귀했어요. 그런데 베네치아에서는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주 넉넉하게 수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라피스 라줄리가 베네치아를 통해서 유럽에 전파가 됐기 때문에 그렇게 가격이 비쌌던 거예요. 그래서 다른 시대에 있는 예술가들은 이런 색깔을 낼 수가 없어요. 그 광물이 없으니까, 너무 비싸니까 그런데 베네치아에서는 그것이 가능했었다는 것. 그래서 이런 파란색 울트라 마린 색채가 바로 조반니 벨리니 예술의 아주 큰 특징이다라는 것.

- 보통은 계란 같은 걸 이렇게 염료에다 섞어서 템테라 기법이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었는데 플랑드르 지방 에서 들여온 기름을 염료에다가 섞어서 쓰는 그 유화 기법을 이탈리아에다가 이제 들여서 시작한게 조반니 벨리니이다. 그러니까 뭔가 윤곽이라든지 이런 색채가 다른 이탈리아 예술가들보다 훨씬 풍부할 수가 있었다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 그 중에서도 또 우리가 또 눈여겨 봐야 되는 이 조반니 벨리니 작품의 특징은 바로 연출입니다. 연출을 굉장히 잘 했는데 이게 벨리니가 상당히 자주 사용하던 연출이 지금 이 그림에서도 보이죠. 이게 지금 보시면 성모 마리아를 굉장히 성스러운 존재로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서 지금 보면은 뒤에 배경을 이 초록색 천으로 공간을 자연과 분리를 시켰어요. 그리고 보시면은 이게 벨리니가 이거 자주 쓰더라고요 이런 스타일을. 여기 지금 보면 대리석 난간이 우리 사진에서 찍힌 것이 아니라 벨리니가 의도적으로 그렸어요 이 대리석 난간을. 그러니까 관람자와 그리고 아기예수와 성모라는 존재를 분리하고 있다라는 것. 자 그리고 석류를 쥐고 있거든요, 석류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근데 그 특히 이 눈에 가는 부분이 성모 마리아가 굉장히 석류를 부드럽게 쥐고 있는 것 그리고 어린 예수를 살짝 감싸쥐고 있는 손길이 있죠. 이 표현도 우리가 벨리니 작품에서 굉장히 많이 볼 수 있는 표현이죠. 이 손길 성모 마리아의 굉장히 어떤 그 깊음 그리고 그 부드러움을 이 손짓으로 또 표현을 하고 있다라는 것. 그리고 관람자와 분리를 한다라는 것을 더욱 더 아주 성스러운 존재로 표현하기 위한 조반니 벨리니의 연출이다라고 보실 수가 있습니다.

 

 

4. 라파엘로: 가바의 성모자와 아기 세례자요한

아츠앤트래블님의 해설:

- 가바는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기 전에 소장자의 이름이다. 르네상스의 3대 천재 중의 한 명인 라파엘로의 또 아주 대표작품인 성모자와 아기 세례자 요한이 이번에 우리 국내를 찾는다는 거 정말 대단하죠.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티치아노와 같은 시대의 활동했었던 예술가 라파엘로 그리고 또 이 라팔엘로 존재 자체가 16세기 초에 르네상스를 완전히 절정으로 이끈 예술가에요. 절정으로 르네상스를 완전히 그 끝으로 끌고 올라간 그런 예술가로 평가를 받는 엄청난 예술가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미켈란젤로라든지 약간 다빈치 보다는 좀 아래급으로 이렇게 막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왜냐면 이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는 건축이라든지 조각이라든지 과학 여러 다방면으로 업적을 많이 달성하는데 반해서 라파엘로는 완전히 회화 분야에만 좀 한정된다라는 그런 평이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보다 회화면에서는 더 뛰어난 그림을 그렸었던 예술가다라는 것, 가장 뛰어난 회화 작품을 그렸었던 예술가다라는 그런 평가를 받죠. 그 중에서도이 작품이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 이 작품이 언제 그려진 거냐면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교황님에게 지시를 받고 대표적인 작품인 아테네 학당을 그릴 때 주문을 받았으니 그 시기가 좀 겹친다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 시기는 가장 원숙한, 그 실력이 절정에 올랐었던 시기의 작품이다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라고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예술적인 특징들이 좀 많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보실 수가 있는데 라파엘로가 먼저 가장 예술적 특징이라고 보신다면 약간 좀 이건 다빈치한테 영향을 좀 많이 받았죠, 그래서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 이런 것들이 좀 잘 아주 드러나고 있고요. 그리고 그림 보시면 윤곽선 요런게 살짝 그 뒤에 있는 배경들 이런 거 보시면은요 약간 좀 번지는 듯한 그리고 이게 약간 좀 그런 표현들이 보이는데  공기원근법이라고 하죠. 우리 모나리자 작품에서도 등장한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보통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다빈치의 예술적 특징이죠. 다빈치를 굉장히 존경했었어요. 그래서 그런 이제 특징들이 좀 나와 있는 모습을 보실 수가 있고 라파엘로가 성품이 상당히 좋은 그런 화가였었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사람들한테 인기가 상당히 많았었는데 그 성품처럼 성모를 굉장히 우아하고 아주 다정한 존재로 굉장히 따뜻함이 느껴지게끔 표현을 했다는 것. 이런 표현은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보다 훨씬

라파엘로가 능했어요. 그러니까 성모를 굉장히 따뜻한 존재, 그리고 또 뭔가 아기들을 상당히 모성애를 자극하는 그런 아주 성품처럼 따뜻한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은 라파엘로가 정말 잘했습니다. 그런 표현들이 여기 잘 드러나는 그래서 이제 뭐 다빈치를 뛰어넘는 그림을 그렸다라는 평을 보통 받고 있었죠. 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 성모의 이미지가 딱 그 라파엘로가 만든 그 이미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 이게 연출도 되게 잘했어요. 보시면은 뒤에 이렇게 배경이 어둡잖아요. 요런 스타일은 다빈치 작품에서도 등장을 하는데 지금 여기 두 개의 아치가 있죠. 요런 스타일들 다빈치 작품에도 등장을 합니다. 근데 그 아치랑 아치가 이렇게 부드럽게 윤곽선 같은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둥그렇죠 그 곡선이 있죠. 근데 그 마리아의 그 목을 상당히 부드럽게 또 그 굴곡을 같이 표현을 하고 있다라는 것 이게 되게 잘 아주 표현됐고 그리고 무엇보다도요 아기들 있죠 아기와 어떤 성모간에 되게 미묘한

심리적인 어떤 상호작용 같은 거 교감, 교감이라는 표현이 잘 맞겠네요 그런 표현들 이런 아이들의 몸짓이나 눈빛이나 그리고 마리아의 얼굴도 굉장히 차분하고 좀 사색적인 분위기고 요게 딱 라파엘로 어떤 작품에 가장 큰 그 성모자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자 라파엘로만 할 수 있었던 그런 스타일이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5. 티치아노: 라스티아보나

 

- 여성의 초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이름은 라스티아보나이고, 달마시안에서 살고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합니다. 달마시안 아시죠 여러분 그 강아지가 아니라 크로아티아 국견이잖아요. 달마시안이 지금의 크로아티아를 의미합니다. 거기에 살고 있었던 여인을 지칭하는 말이 라스티아보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아마도 달마시아에 살고 있었던 여인의 초상을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그 라스티아보나라는 이름을 이제 붙인 것이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요거 상당히 커요 또 작품 사이즈가 이게 한 1m 정도 되는 그런 작품인데 굉장히 멋있습니다. 이 작품 가서 직접 보시게 되면은 엄청 현대적인 느낌 중요하죠, 지금 그 보셨던 작품들 라파엘로 작품과 그렇게 시기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좀 현대적인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 티치아노도 엄청난 대가죠. 그러니까 르네상스 시기에 베네치아에서 활동했었던 베네치아 출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꼽히는 예술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근데 이 사람의 별명이 뭐였었냐면 회화의 군주 그리고 색채의 대가 뭐 이렇게 불리기도 했었죠. 그리고 살아있을 때 당시에는 전 유럽에서 그림값이 티치아노 작품이 가장 비쌌다. 우리 지금 동시대에 가장 비싼 화가 화가가 있다면 누구 뭐 데이비드 호크니 이렇게 많이 꼽잖아요. 여러분 그런 존재였었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인기가 엄청났는데 당시 이 티치아노를 후원하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였었냐면 그냥 뭐 부유한 귀족 이런 거 아닙니다 유럽의 지배자들이 있죠 교황님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주 클라이언트였었어요. 아예 티치아노를 전속 화가로 임명을 해가지고 나중에 기사 작위까지 막 주고 했었던 그런 일이 있기도 했었죠. 그리고 나중에 이 사람이 막 후대에 또 굉장히 또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한테 워너비 같은 후대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 그런 예술가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작품도 온 틴토레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미켈란젤로의 데생 그리고 티치아노의 색상, 그것을 이렇게 종이 포스트잇처럼 글을 써 놓고 자신의 각오를 다지는데 평생을 붙여놓고 그림을 그렸었다고 한다. 

 

- 티치아노가 90정도까지 살면서 굉장히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특히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귀족들이 당연히 돈 주고 귀족들이 그런 힘 있는 사람들이 이제 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많이 주문을 했었겠죠. 그리고 제단화도 많이 그렸고 다양한 작품들 거의 90까지 살았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작품들을 좀 남겼었어요. 그 중에서도 이제 초상화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에 찾아온다. 

 

- 넘치지 않는 디테일 그게 지금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보시면 돼요. 뭔가 이 절제된 화려하지 않지만 기품과 우아함이 느껴진다. 넘치지 않는 디테일이 아주 고급스럽다 보시면 돼요. 아마도 이 여인이 원래 달마티아가 1420년도부터 시작해서 18세기 1797년까지 베네치아공화국의 식민지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상당히 많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그 달마티아에 가서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그림을 그린 것이 그곳에 살던 여인이 어떻게 했는지 좀 만나서 베네치아로 이분이 왔던지 해서 그분의 초상화를 그려준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작품이 꽤 사이즈가 커요 1m 정도 됩니다. 그래서 멀리서보다 굉장히 좀 큰 상당히 아주 큰 인상을 주는데 아마도 그런 것을 우리가 그림의 스타일을 볼 때 달마티아 쪽에 사는 힘 있는 권력자 집안 여성일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어요. 뭐 과거에는이 사람이 아마 그 베네치아 지배를 받던 키프로스에서 추방된 키프로스의 마지막 군주, 근데 이 군주 그러니까 여왕 남편이 죽고 원래 베네치아 여성이었지만 키프로스 왕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죽고 그 키프로스의 권력을 이어받았었던 여왕인데, 이제 베네치아에게 나중에 땅을 결국에 뺏기게 되고 키프로스를 뺏기고 추방된 여인, 여왕일 것이다라고도 이제 추측을 하는데, 내셔널 갤러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니까 아닌 것으로 보인다라고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 어쨌든 중요한 것은 표현력이 상당하다는 것, 막 절제된 표현들이 있죠,  반지 같은 것도 좀 있는 거 같고 그리고 목걸이도 진짜 되게 표현력이 좋죠. 이게 막 뭐랄까 절제해서 좀 되게 세련되면 강조하고 있는듯한 그리고 보시면은 머리도 보시면 베일인가요 투명천 같은 거 요게 다루는 솜씨가 어마어마하지 않나요. 그리고 이 베일 같은 것에 막 금실 같은게 이렇게 들어가 있잖아요. 화려하지 않지만 그 투명한 베일 천을 다루는 솜씨가 진짜 대단하다. (이 여인은 역사적 인물인데 따따리나 코로나로?) 어쨌든 표현력이 대단하죠. 그리고 흉상 같은 거 있죠. 이것도 아주 독특하지 않나요. 그리고 여기 TV라고 써 있죠 요게 티치아노 베첼리오 본인의 이름인데 난간에다가 새겨놨다. 브로치 카메오는 옛날부터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그런 장식 악세서리였었거든요.

 

 

6. 벨라스케스: 대주교의 초상

 

-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 페르난도 데 발데스 대주교의 초상이다. 예술적 특성이 잘 살아있는 중요한 작품이 들어왔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사람으로 1599~1660년.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손님들, 주로 귀족들인데 집에 가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또 왕실이 시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시녀들을 그리기도 했는데, 로마의 도리아 빰삘리 궁전이라는 곳 거기에 이노첸시오 10라는 작품, 이게 가장 초상화 중에 유명한 작품이다. 근데 이 작품과 유사한 점이 많다. 

- 이 페르난도 데 발데스라고 하는 주교님이 입술을 딱 굳게 다물고 있고요,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서 굉장히 좀 권위감이라고 할까요, 눈썹과 이런 부분들이 눈빛이 약간 어떤 미안(?) 흔적이 전혀 없죠. 이 볼도 약간 발가스름하고 진짜 피부 톤 같기도 하고,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좀 보이는데. 그 안에서도 시선이 당당하고 되게 고상하게 느껴진다. 이노첸시오 10세에서는 굉장히 히스테리적이고 막 거친 그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거든요. 거기에다가 어떤 성향 같은 것을 담아서 표현한다는 것인데, 단순히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기질적인 그런 느낌을 되게 잘 표현했어요. 그래서 거장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분 같은 경우는 좀 뭐랄까 당당하고 딱딱한 느낌도 있지만 뭔가 모르게 권위가 느껴져요. 그런데 그런 어떤 히스테리한 느낌보다는 벨라스케스가 되게 존경하고 있는 듯한 시선이 좀 느껴지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분이 되게 훌륭한 그런 종교인이었었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그런 느낌들 뭔가 딱딱하지만 고상한 이런 시선이 잘 느껴지죠. 거기다가 붓칠도 느슨하고요, 하지만 오히려 느슨하기 때문에 훨씬 막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듯하다. 너무 디테일하게 표현하면 되게 고정된 느낌이잖아요. 근데 이렇게 탁탁 칠하면서 그 순간의 느낌을 되게 잘 살렸죠. 거기다가 그림을 대충 그리는게 아니죠, 금실 같은게 커튼에 살짝 장식돼 있잖아요. 빨간색 커튼이 수수하지만 뭔가 되게 미묘한 뭔가 그런 웅장함 같은 것이 보이죠. 

 

- 이번에 세잔 작품도 오는데, 세잔의 사과가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열광을 하고 뭐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과거에는 이 사과를 굉장히 탐스럽고 이렇게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었다면, 세잔은 되게 우직하게 그런 어떤 사과 가지고 있는 모든 이 색깔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막 담겨져 있어서 단단하고 막 이런 느낌이 표현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과를 탁 쥐었을 때 손에 어떤 그 사과에 대한 사과가 가지고 있는 그 실체에 대한 존재감 같은 거 있죠. 세잔은 그걸 그리려고 했었던 거예요. 사과라는 그 실체감, 제가 이 그림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을 보면서 딱 세잔이 떠올랐어요. 그러니까 이 대주교님의 그 존재, 살아있는 대주교님의 그 실체에 대한 존재감이 너무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라는 것이죠. 어쨌든 이분이 그라나다 쪽에서 대주교로 임명이 되시는데 나중에 마드리드 왕실이라던지 이런데 아마 초청 받으신 거 같아요. 거기 가셨을 때 이제 당시에 이 벨라스케스가 펠리페 4세 밑에서 궁정화가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벨라스케스에게 이 초상화를 맡긴게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또 추측을 해 보실 수가 있습니다.

 

 

7. 산드로 보티첼리: 성 제노비오의 세가지 기적

- 라파엘로 이전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성 제노비우스의 세 가지 기적이라는 작품. 성 제노비우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주요 수호성인이다. 그분의 일생에서 이제 가장 중요한 기적 부분들을 표현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선배, 딱 그 직속 선배였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분이 상당히 성격이 굉장히 유쾌하시고 아주 재밌는 분이셨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분의 이름 보티첼리가 작은 술통이라는 뜻입니다. 작은 술통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상당히 유쾌한 괴짜로 알려져 있다. 피렌체에서 종교개혁자 지루라모스 사고나 롤라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신권 정치 세력을 만들어서 피렌체를 장악하게 되는데 그 시기에 보티첼리가 푹 빠져 사람이 달라집니다. 원래 보티첼리의 대표작하면 비너스의 탄생이나 봄을 떠올리는데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비교적 말년의 작품이고, 말년의 작품은 종교 주제의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보티첼리가 죽기 한 10년 전쯤에 그린 후기 작품이다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그래서 이제 완전히 그 종교에 빠져있었을 때 작품이고, 성 제노비우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주요 성인이고, 피렌체의 초대 주교라고 알려져 있다. 

 

- 성 제노비우스의 삶을 보여주는 4개의 그림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적편이라고 보실 수가 있고요. 이 분에 대한 소개 글을 보니까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요 그리고 귀신을 쫓기도 하고 되게 많은 기적을 행했었던 그런 분이시고 지금 이 피렌체에서 성자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세 가지의 기적이다. 맨 왼쪽은 지금 귀신을 쫓고 있다. 주교가 십자가를 그으니 두 젊은이의 입에서 악마가 튀어나오고 사람들은 공포의 장면이다. 드라마틱한 모습을 모이기 위해 동작을 크게하는 르네상스적 느낌이다. 중앙장면은 죽은 아이를 엄마가 무릎에 안고 있다. 주교가 기도로서 아이를 살리는 장면이다. 맨 오른쪽은 자신의 교회 앞에서 매일같이 구걸하고 있는 그 맹인의 모습을 보고 지금 기적으로서 눈을 뜨게 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상당히 디테일하게 배경을 그렸다는 점을 우리는 꼭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 보시면은 뒤에서 회색톤 건물은 딱 그 시기 15세기~16세기 초 피렌체의 건축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되었다.  이렇게 회색 돌로 지은 건물들 피에뜨라 세레나라고 합니다. 지금도 그 건축물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예술가들 중 보티첼리와 조반니 벨리니가 제일 먼저 태어난 그런 분들이세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앞에 있었던 그런 분들이십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이런 공간감이라든지 배경을 상당히 중요시 생각하고 그림을 그렸었다는 것. 근데 중요한 것은 제가 사진으로 이렇게 봤더니 지금 피렌체의 이 건축물하고 옆에 보이는 이 공간하고 똑같이 생긴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자연적인 앞에 보이는 그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자 했었다는 것, 그리고 원근법이라든지 막 수학적으로 되게 치밀하게 공간을 계산해서 그리려고 했다라는 것이 중요하죠. 근데 그게 왜 중요하냐면 여러분 중세시대 때 그러니까 바로 보티첼리 이전에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면 뒷 배경을 다 금색으로 칠했잖아요. 그게 뭐냐면 천상의 빛을 표현하는 겁니다. 천국의 세계를 표현하는거죠.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중세시대 때는 신이 사는 공간이 더 중요한 거죠. 그런데 이 보티첼리 같은 경우는 그 성서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피렌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라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을 했다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이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러니까 내세 죽고 난 이후의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성경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산 성인의 그 세상의 이야기를 피렌체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이 중요하죠. 그러니까 르네상스가 우리가 인간 중심의 어떤 사고 체계라고 볼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인간으로 중심으로 이제 도는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발 딛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있다라는 것, 이런게 이제 이 보티첼리 그리고 이 시기 르네상스 시대 때 예술가들의 작품들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이런 새로운 표현들이 나오고 있었다라는 것이죠 그게 중요합니다.

 

- 창문 하나하나의 오픈 정도도 다르다. 야 그러네요 이게 또 아주 재미난 요소네요. 역시 같이 그림을 보면 서로가 여러 우리의 시선들을 공유할 수가 있죠. 여기 지금 이렇게 문들이 다 젖힌 그게 다른게 너무 재미있네요.

 

 

8. 클로드 로랭: 성녀 우르슬라의 출항

 

- 클로드 로랭의 성녀 우르슬라의 출항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같은 경우는 윌리엄 터너의 작품과 같이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랭이 후대에 윌리엄 터너라는 영국의 화가가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둘을 비교하는  작품과 함께 걸려져 있어서 사실 굉장히 중요한 작품 중에 하나라고 보실 수가 있죠. 

 

성녀 우르슬라의 출항은 배경이 예술이고 굉장히 멋진 작품인데 로랭은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풍경화가라고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화가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왜냐하면 이분이 살아생전에는 거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활동을 했었고 그리고 본명이 로랭이 아니에요 사실은 클로드 젤레라고 합니다. 프랑스 로렌지방에서 태어나셨죠. 그래서 아마 이제 끌로드 로랭일 거예요. 우르슬라는 만 천명의 동정녀를 데리고 로마를 순례한 성녀입니다. 이 분이 지금 그림에서 노란색 옷을 입고 계시는데 작게 그려져 있다. 13세기 황금 전설이라는 곳에서 따르면요 브루타뉴 출신의 공주였습니다. 우르슬라가 그 11,000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로마로 성지 순례를 갔어요. 그리고 지금 그 로마에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가는 장면일 겁니다. 사실 이제 이후에 이야기는 이분이 독일 쪽 쾰른에 들리게 되는데 여기에서 야만족장에게 잡히고요, 그 족장이 청혼을 하는데 거절을 하시죠. 그리고 종교를 버릴 것을 강요합니다. 근데 이분이 끝까지 자신의 종교를 지키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다.

 

- 이 그림은 로마의 어느 성당이다. 화가는 프랑스 출신이 지만 로마에서 평생 살면서 로마의 주요 장소들을 많이 그림에다가 집어넣었었죠. 이 장소가 베드로가 순교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마 브라만테가 이 성당을 건축을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실제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 상상 속에 그런 배경으로 아주 장엄하게 멋진 그 장면을 막 귀국하는 성녀의 그 모습을 장엄하게 아주 멋지게 표현을 했다. 중요한 것은 로랭은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고, 그래서 초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없어요. 그러다가 독일을 거쳐서 나중에 이탈리아로 넘어가셔서 거기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을 하신 거죠. 거기에서 아고스티노 타시라는 사람 밑으로 들어가서 그림을 배우는데 그때 당시에 그는 이탈리아 최고의 풍경화가였었고, 그래서 그 사람의 영향이 좀 있죠. 근데 사실 아고스티노 타시는 되게 질이 나쁜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 아시죠 그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가 예전에 스승님한테 강간을 당해 가지고 그런 평생에 좀 아픔을 가지고 살았었던 그런 여성화가였었잖아요. 그 젠틀레스키를 강간해서 처벌을 받았었던 그런 전역이 있는 화가 있었죠. 어쨌든 그 아고치노 타시가 실력은 있었고, 그 밑에서 수업을 받고 그러면서 나름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 클로드 로랭이 로마에 완전히 정착하고, 그리고 외곽의 시골 유적 같은데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고대 유적들도 보게 되고요. 그리고 굉장히 좀 순수하면서 고대 유적을 보게 되면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뭔가 지금 폐허가 된 모습을 통해서 어떤 향수 같은 것도 느끼게 되는 거거든요. 그림을 통해서 과거를 연상하고 그리고 또 어떤 아름다운 정경도 찾을 수가 있고 과거의 향수와 연상되는 그런 장소들을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그러면서 고대 로마를 연상한듯한 그런 스타일의 그림들을 상당히 많이 그렸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대기, 빛 같은 것들을 굉장히 고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활용하면서 아주 현실보다도 훨씬 장엄한 분위기로 그림을 그리는데 상당히 능한 사람이었었죠. 근데 그림 대부분이 그 작품들의 특징을 보면요 정확히 어디를 그렸는지 알 수가 없어요. 로랭은 늘 상상 속에 그 배경을 많이 그렸었던 여러 그 이미지들을 조합해서 이야기 안에다가 녹여 놓은 것이 아닌가라고 이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약간 뭐랄까 풍경화라고 하기도 애매한게 상상 속의 배경이고요, 그리고 또 이런 성화라고도 좀 애매한게 사람들을 되게 작게 표현했다는 거, 역사도 아니고 어쨌든 약간 애매한데 중요한 것은 이분의 그림에서 우리가 봐야 되는 것은 뭐 이런 태양의 모습, 일출의 모습이라든지 일몰의 모습, 이런 장엄한 분위기 같은 것 그리고 이 보트의 실루엣 같은 거, 이런 걸 통해서 분위기를 더 멋있게 포착하고 연출하고 있다는 것. 이런 부분들이 로랭 작품에서는 아주 우리가 같이 봐야 되는 그런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런 스타일을 많이 따라 했죠 바로 윌리엄 터너 딱 윌리엄 터너의 그림의 그 스타일이 있잖아요. 윌리엄 터너가 바로 이 끌로드 로랭에게 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그림을 다 기증하면서 자신의 그림이 로랭과 같이 전시가 되길 바랬어요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내셔날 갤러리에는 로랭 작품과 같이 걸린 전시실이 있죠. 

 

 

9. 고야: 이사벨 델 포르첼 부인의 초상

 

- 프란시스코 고야의 '이사벨 델 포르첼 부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입니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가 북구 유럽쪽 미술 작품들을 따로 중요하게 분류를 해 놨고 그리고 르네스상스 초기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들을 상당히 또 디테일하게 아주 잘 분류를 해놨어요. 그리고 바로크 시기를 분류해 놨고 그리고 영국 화가들을 또 분리해 놨습니다. 그리고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까지 굉장히 명확하게 딱 구획을 지어서 예술적 그 사조별로 상당히 잘 전시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요번 전시가 보니까 제가 그 작품들이 그 지금 모인걸 딱 보니까요, 그리고 또 르네상스의 후기 작품들도 잘 모아놨어요. 그리고 바로크의 시작 그리고 바로크의 전성기도 다 보여주고 있어요. 그리고 북구 유럽 네덜란드의 미술도 다 모아놨어요. 그리고 또 베네치아의 풍경화를 그렸었던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따로 모아놨고 그리고 영국 화가들을 작품들도 모아놨어요. 요번에 그리고 인상주의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 그러니까 모네에서부터 세잔과 빈센트 반 고흐까지 이렇게 정리가 돼서 요번에 52점이 온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대단하죠

 

- 프란시스 고야가 원래 또 최고의 초상화가잖아요, 엄청난 사람이잖아요, 완전 잔치예요 여러분 최고의 초상화가였죠. 프란시스코 고야가 사람들이 보통 우리가 고야 하면은 되게 어두운 그림들이 있죠. 그런 거 많이 떠올리잖아요. 사실 동판화집 있잖아요 그 되게 유명한 로스 카프리쵸스라든지 아니면은 블랙 페인팅이라고 하는 되게 어두운 그림들 막 다크한 그림들을 많이 떠올리지만 사실 굉장히 아주 그 뭐랄까 초상화 아주 특별한 초상화였었다. 본인도 존경했었던 그 우리가 서양 미술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평가하는 렘브란트랑 비교되는 그 정도의 아주 훌륭한 초상화가였었다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블랙 페인팅만 많이 떠올리고 그렇잖아요. 초상화 아주 뛰어난 초상화를 그렸었던 그 살아 생전에 이분이 남긴 초상화 개수가 350여 점이 넘어요 굉장히 많은 초상화를 본인 그 작품에 다 통틀어 1/3이 거의 초상화 그리고 본인 자체가 사람들한테 초상화로 기억되기를 바랬었다.

 

- 초상화 여성분들 아주 기가 막히게 잘 그려주는 화가가 누가 있냐면 구스타프 클림트가 있죠. 그리고 보티첼리도 여자분을 상당히 잘 그리십니다. 근데 여자분을 최악으로 그리시는 분은 피카소. 피카소의 아마 도라마르 초상화는 얼굴 완전히 개코원숭이에다가 손에 망치 같은 거 들고 있고 철퇴 같은 거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여성을 피카소가 아주 최악으로 표현하는데 반해서 프란시스코 고야는요 아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신의 아들을 뜯어먹고 있는어떤 신화 속 인물들 이런 것들 막 떠올리잖아요. 아니라니까, 진짜 프란시스코 고아는 여성 초상을 아주 기막히게 잘 그렸었던 예술가예요.

 

- 작품은 과거의 귀족 부인의 초상화들과는 좀 다르죠 좀 현대적인 느낌이 있어요, 세련됨이 있습니다. 뭔가 응시하는 듯하고 호기심에 찬 모습이다. 평범하지만 투박하지도 않고 뭔가 이렇게 막 특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생동감이 있고 실체에 대한 존재감도 분명하고 뭔가 대화가 담겨 있는듯한 그런 느낌, 거기에 이제 상당히 현대적인 느낌이 있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 프란시스코 고야가 벨라스케스를 굉장히 존경했거든요. 벨라스케스에다가 뿌리를 두고 있어요 벨라스케스의 그 초상화에. 하지만 약간 구성 자체는 모더니티 그런 현대적 느낌을 적용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스타일을 우리 그 19세기 화가들 마네라든지 드가라든지 피카소 이런 예술가들로 이어지게 된 겁니다.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고 뭔가 막 환상적인 그런 세세함 이런 것을 불어넣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되게 빠르게 속도 있게 그림을 딱 그렸죠. 그래서 보시면은 뭐 이런 레이스 표현들 같은 거 그냥 쓱쓱 그렸죠. 근데 그러면서도 요즘 베일 있죠 요거 투명한 이게 만텔라라고 하는데 이 블랙 레이스 같은 거는 또 굉장히 아주 정교하게 또 그렸다는 것, 그러면서 물감도 적게 쓰고 이제 뭔가 붓의 획도 좀 다른 그림들보다 적죠. 이런 것들 보시게 되면 이게 고야의 그림의 특징이에요. 거의 디테일 같은 것들을 죽여버리죠 없애죠 그냥 쓱쓱 바른 듯한 그런 그러니까 오히려 훨씬 더 생기있게 생동. 요렇게 여러분 대충 칠한게 아니라 이렇게 그려도 사람의 모습이 상당히 생기있게 전달된다라는 것 그러니까 표현의 방식인 거예요. 고야의 이런게 더 어려운 겁니다.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라는 것. 눈에 보이는 거 디테일하게 그린 것은 누구나 그릴 수 있잖아요. 근데 이렇게 빠르게 칠함으로써 오히려 생기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라는 그 표현을 구현하고 있다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이다. 눈화장이 또 옛날 사람 같지 않고 제가 말한 부분이 그런 거예요 뭔가 모르는 세련미가 있다니까요. 고야의 그림은 그렇습니다.

 

 

10. 빈센트 반 고흐: 길게 자란 풀과 나비

- 빈센트 반 고흐의 '길게 자란 풀과 나비'라는 작품이 이렇게 길게 자라는 여기 지금 풀과 잔디와 나비가 있죠. 바로 이 작품이 제가 꼭 여러분들에게 놓치지 마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정말 멋있습니다. 저는 사실 사이프러스나무 있거든요, 내셔널 갤러리에 해바라기도 있고 근데 전 사실이 작품이 더 좋더라고요. 이 작품은 그렇게 알려져 있는 그런 작품은 아니지만네 뭔가 특별하지 않나요. 이런 빈센트 반고흐의 이런 색채적인 표현들이 색깔들 보시면은 이게 빈센트 고흐가 끊임없이 관찰을 통해서 우리가 이 일반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색채들을 자연에서 본 거예요. 그래서 이런 특별한 색으로 길게 자란 이 잔디를 그렸죠. 근데 우리는 이런 색깔을 못 봅니다. 고흐 같은 사람은 봐요.끊임없이 관찰을 하죠. 그러니까 수시간 동안 그 뜨거운 태양을 맞아가면서 움직이지 않고 봐요. 그러면 그 안에서 고흐가가 순간에 이 특별한 칼라를 포착을 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거죠. 나비의 표현 보소, 고흐의 순수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확대가 아니고 전체 모습이에요. 그래서 더 특별하고 되게 독특하죠 .

 

- 자 여러분,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정신병원에 있었던 시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르에서 자기 귀를 자르잖아요. 그리고 그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고흐가 오는게 무서우니까 꺼리고 막 그러니까 그래서 고흐가 이제 차로는 30분 정도 걸려요 생랩이라고 하는 그 마을 근처에 있는 생포 홀드 모쏠이라고 하는 병원으로 당시에 이제 스스로 들어갑니다. 본인이 직접 들어가요.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하니까 그곳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1년을 머뭅니다. 이 병원에서 정말 많은 작품을 그린다. 거기에서 태어난 작품이 '별이 빛나는 밤', '꽃피는 아몬드 나무'가 있다. 그 병원이 정말 적막하다. 황량한 돌산이 있는 평원에 그 병원이 있다. 젊은 나이에 거기에 딱 들어갔을 때 자기 발로 들어갔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보세요. 나는 진짜 너무 무서울 것 같아. 진짜 거기 가시면 되게 평화로워요. 그렇지만 그곳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 외딴곳에 떨어져 있어서 영원히 사회와 단절되지 않을까 되게 두려웠을 것 같아요. 그 정말 막장까지 가고 막다른 그 낭떠러지의 그 앞에까지가 있었을 때 바로 고흐가 그곳에서 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외로움과 정말 별의별 걱정과 마음을 느끼고 있었을 때 '별이 빛나는 밤'과 그리고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가 나왔잖아요. 그리고 바로 지금 앞에 보이는 이 작품이 나왔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길게 자란 풀과 나비, 이거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요.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이 너무 좋은게 많기 때문에 이거는 그냥 잊혀 뭐랄까 그렇게까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서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에요 사실. 근데 저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을 좋아했어요. 근데 마침이 작품이 온다라는 거예요

 

- 물론 내셔널 갤러리에 가시면 해바라기도 있고 사이프러스 나무도 있고 그리고 그 빈센트 반 고흐의 의자도 있고 다양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 중에서 딱 이 작품이 오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여러분 그 진짜 이 두려움에 단절돼 있었던 그 시기에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작품이에요.  사실 그 병원 구역 내에서는 그곳에 있는 관리자들이 고흐가 이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지했었어요. 빈센트 반 고흐가 자꾸 막 격정에 휩싸이고 있었고 막 간질 발작 일으키기도 하고 그때 막 물감을 막 짜 먹기도 하고 막 그래요. 막 어떤 터져 나오는 분노나 외로움이나마 이런 거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오히려 그림 그리는 것이 빈센트 반 고흐의 병세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이 병원 내에서는 어떠한 곳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한테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어요. 근데 여러분 빈센트 반 고흐가 산책을 하다가 어느 날 아주 작은 그 잡초하고 막 이 풀들이 뒤섞인 그 버려진 정원을 찾아요. 그리고 그 버려진 정원은 제한 구역 내에 포함되지 않다라는 것을 빈센트 반 고흐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렸어요. 이 그림은 그 제한된 구역에 있는 정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그릴 수 있는 장소였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시기에 그 한정된 기간 안에 그때 그린 작품이에요. 여러분 버려진 정원을 그린 거예요. 근데 여러분 그 버려진 정원을 이렇게 이쁘고 이렇게 특별하게 그렸다라는 것, 그게 빈센트 반고흐 작품에 가장 우리가 위대하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진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되게 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 이런 것들을 우리 비근이라고 하죠 비근, 눈에 매일같이 채이는 것들이 있죠, 고흐가 그린 것들은 다 그런 것들이잖아요. 사이프러스 나무라든지 올리브 나무라든지 매일같이 볼 수 있는 프로방스의 풍경들 이런 것들 이잖아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요. 근데 그걸 그렇게 특별하게 그렸잖아요. 심지어는 여기는 버려진 정원이에요. 여러분 그렇지만 빈센트 반 고흐 눈에는 이 초라하고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이 버려진 정원도 되게 특별하게 보인 거예요. 이게 진짜 빈센트 반고가 위대한 화가다라고 할 수 있는 것, 그 포인트다라는 겁니다. 그 순간에 작은 나비까지 보고 여러분 세상을 참 특별하게 볼 수 있는 그 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 피카소가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는데 뭐 이미 13살 때 14살 때 라파엘로 처럼 그림을 그렸지만 내가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데는 40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근데 그게 그 피카소가 이야기하고자 했었던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그 의미는 뭐냐면 여러분 아이같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어린 아이들처럼 그렇게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는 데는 40년이 걸렸다는 거죠. 그러니까 자꾸 찾아서 진짜 그 어린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드디어 피카소가 40년이 걸려서 찾았다라는 거예요. 근데 빈센트 반 고흐는 그 눈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세상을 특별하게 보는 그런 눈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그런 아티스트라는 것이죠. 여러분 버려진 정원을 이렇게 특별하게 그립니다. 그 실제로 데이비 테크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우리가 그 빈센트 반 고흐를 이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아메리카에 있는 모텔방 같은 거 있죠 고속도로에 있는 거기에 1년을 가두더라도 매일같이 새로운 그림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거예요. 매일같이 새로운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것 정확하게 얘기한 거예요. 빈센트 반 고흐는 매일같이 특별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그 싸구려 모텔방 생각해 보세요, 막 낡은 침대에 삐걱삐걱 미국에 그 고속도로변에 있는 모서리 깨지고 막 그런 막 욕조 막 이런 거 더러운 그 공간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는 그런 그림을 그릴 거라는 거가 진짜 그렇게 그렸죠. 여러분 우리 그 오르쉐 미술관에 가시면 아르레 침실이라는 작품이 있죠. 그 추레한 방.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렸다 그래서 빈센트 반 고흐는 진짜 볼품없고 추한 것들 남루한 것들 그런 것에다가 시선을 머무리고 멈추고 그 안에 감춰진 아름다움을 보는 화가다라는 것. 그래서 그 버려진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그냥 어떤 이 공간 사람들한테 완전히 버려진 그 작은 정원이 있죠, 관리도 되지 않은 그 정원도 그는 추하고 남루한 것에 아름다움을 찾아서 이와 같이 그림으로 남겼다라는 것. 자 여러분 이 길게 자란 풀과 나비 저의 마지막 10번째 픽이었습니다.

 

 

18:10 조반니 벨리니_ 26:15 라파엘로_가바의 성모자와 아기세례자요한 34:18 티치아노_라스티아보나 44:00 벨라스케스_대주교의 초상 50:45 산드로 보티첼리_세가지 기적 59:30 클로드 로랭_성녀 우르슬라의 출항 1:08:00 고야_이사벨 델 포르첼 부인의 초상 1:16:50 반고흐 _길게 자란 풀과 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