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둘레길/수도권 둘레길

봉선사~광릉~국립수목원 (2023.6.30)

클리오56 2023. 6. 30. 20:14

일자: 2023.6.30
산명: 남양주군 광릉 일대
등로: 봉선사 ~ 광릉숲길 ~ 광릉 ~ 국립수목원 ~ 광릉숲길 ~ 봉선사 입구
소요시간: 5시간58분 (휴식시간 39분 포함)
도상거리: 16.09km

Track_2023-06-30_봉선사광릉국립수목원.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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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의 상반기 마지막날에 썩 괜찮은 걷기를 다녀왔다.

유튜버 "슬기로운 캠핑생활"님의 소개로 전철 진접역 개설로 광릉 일대가 접근성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봉선사, 광릉, 국립수목원을 한 셋트로 즐거운 도보여행을 가졌다.  

전철 4호선 종점이었던 당고개에서 다시 전접역으로 연장되었다. 여기서 버스로 봉선사 입구에서 하차.

 

나무위키에 소개된 봉선사를 정리해보겠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969(고려 광종 20)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조선 예종 1) 정희왕후 윤씨가 광릉의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명종 6)에는, 문정왕후에 의해 교종의 중심된 절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하여 교학을 진흥하는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 번 수축했다. 그러나 19516.25 전쟁 때 다시 법당과 함께 14150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특이한 사항으로 보통 사찰에서 대웅전의 기능을 하는 전각의 현판이

봉선사에서는 한글로 그냥 '큰법당'이라고 되어 있다.

봉선사를 재건한 운허는 경전의 뜻만 알면 되는데 경전을 보기 위해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굳이 한문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이런 운허의 뜻으로 우리나라 사찰 중 최초로 한글 현판이 탄생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큰법당은 주련에도 한글을 사용했음은 물론,

내부에도 화엄경과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에 새겨 벽면에 붙여놓았다.

또 이 큰법당은 재건 당시 콘크리트를 사용했는데 언뜻 생각하면 가치가 없을 것 같지만 한글 현판을 사용한 운허의 뜻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이 오히려 당시 기술을 대표하는 사례로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522호로 지정되어있다.

 

절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소설가 최서해가 이곳에 승려로써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

192410월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약 3개월 동안 승려로서 봉선사에 기거하며 탈출기를 수정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을 번역하기도 했다고.

 

절 입구에 여러 부도탑이 있는데 그 끝에 1975년에 세워진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있다.

봉선사에 이광수의 기념비가 있는 이유는 이광수가 속세의 운허와 동갑에, 8촌 친척이라는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 이력 때문에 해방 무렵 갈 곳이 없었던 이광수를 거둬준 이가 운허였는데

그는 이광수가 인근 사릉 근처에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이광수는 사릉에서 1944~1948년까지 살았는데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운허의 도움으로 봉선사에 들어가 은거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사릉과 봉선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광수가 쓴 작품이 <도산 안창호>, <나의 고백>, <돌베개>이다.

 

기념비는 이광수의 전처인 허영숙이 세운 것으로 그녀는 홀로 자녀들을 키우고

말년인 19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는데 납북된 이광수의 생사를 알기 어렵게 되자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9755월 귀국하였는데 갑자기 여러 병을 얻어 기념비를 세우기 직전인 9월에 사망하였다.

사실 이런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알기 어려운데 경기도에서 친일 문화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를 하고 있고

이 기념비가 경기도에 소재한 대표적인 친일 잔재물로 꼽히고 있어 향후 청산 대상이 될 지,

보존 대상이 될 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 대중들에겐 가수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도 유명하며

가왕 조용필 역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정리하다보니 장황하게 되었는데 결국 봉선사는 조선 세조의 능침사찰이었고
아주 유명한 강남 봉은사가 선종의 수사찰이듯이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이었으니 그 위세가 상당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대웅전 현판을 한글로 큰법당이라 하고 주련도 한글을 사용하였으니 의의가 깊다.

 

봉선사 입구, 운악산 봉선사라는 한글 현판이 이채롭다.

교종본찰이라고 당당하게 내세웠다. 좌측에는 운악산 봉선사라는 큰 표시석이 세워져있다.

부도탑

부도탑 사이에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있다는걸 미처 알지못했다.

나무위키의 언급을 읽고 사진을 확인하니 좌측 2번째가 이광수 기념비이다.

비석 정면에 한글로 이광수 기념비라 적혔고 좌측에 그의 글들이 새겨져있다. 

북한 정권놈들은 아직도 납북한 이광수의 생사에 대하여 밝히지 않고 있다니 아무튼 잡놈들이다.  

 

그리고 이 또한 이제서야 알았는데 맨 좌측은 1972년 봉선사를 확장할 때 큰 시주를 한 사람들의 공덕비인데

그 시주자가 이후락과 아마도 그의 모친이라고 한다. 이월파라는 이름이 보이니 그가 이후락이다.

봉선사는 큰 연못이 있어 여름이면 연꽃으로 화려하다는데

도처에 부처님을 모셔 산책하는 분위기가 좋을듯 하다. 

수령 5백년이 넘는 느티나무, 세조의 왕비 정현왕후가 봉선사를 중창할 때 심었다고 한다. 

봉선사의 큰법당과 한글로 적힌 주련들, 이렇게 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아무튼 깬 스님들의 노력에 감사드린다.

봉선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비로자나 삼신 괘불도가 있는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보았다.


이런 디지털 불전함은 처음 대한다. 카드와 페이로 가능하다. 봉선사는 여러모로 첨단이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듯한 불상

절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소개된 글을 옮겼다. 

7월중순이면 연꽃이 만발할 듯하다. 그때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이제 걸음은 광릉숲길로 옮아간다. 봉선사 입구에서 국립수목원 정문까지의 약 3km를 광릉숲길이라하며

나무데크로 걷기가 편하며 도중에 오솔길이 있는데 최근의 폭우탓인지 개방되지 않았다.

도중에 광릉도 들렀다.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에 관한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의 소개를 옮겨본다.

홍살문, 특이하게도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가 보이질 않는다.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나무위키에서 광릉에 관한 정보를 옮겨왔다.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조성할 때 죽을 때 빨리 썩어야 하니 석곽과 묘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자신에게 큰 돈을 쓰지 말고 간소하게 능을 조성하라는 뜻에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정확히는 석실 형태의 석곽을 만든 후 안에 관을 집어넣는 이전의 조선왕릉과 달리

세조는 회곽묘 형태로 관이 들어갈 구덩이만 석회로 다진 회곽에 안장했는데,

역설적으로 석회가 주성분인 삼물(三物·석회와 황토, 가는 모래를 2 : 1 : 1로 섞은 것)이 돌처럼 굳어

방수 기능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회곽에 안치된 시신은 석곽에서보다 천천히 썩는다.

그걸 넘어서 사실상 안 썩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무덤에서 미라가 대거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에는 왕릉 건축과 조성 과정에서 엄청난 돈과 백성들의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는데

세조가 부역 인원과 조성 비용을 절반 이상 감축하게 한 것이다.

그 외에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시신이 빨리 흙이 되어야 좋다고 생각한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광릉은 평소 왕릉 조성 비용의 절반 남짓으로 묘역이 조성되었고,

덕분에 왕릉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광릉은 조선 왕조는 물론 조선 장례 문화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후의 왕릉 조성에도 큰 모범이 되었다.  1483년 그의 정실 정희왕후 윤씨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

원래는 정창손의 조부인 정흠지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시켰다.

왕릉에 접근이 불가하고 정자각에서 좌측 세조, 우측 왕후의 능을 바라보기만~

아래 V자 모습 사진은 나무위키에서 가져옴.  

광릉내의 숲길을 개방했는데 6.30일 오늘이 마지막날이라 무리해서 왔고

복자기 숲길이라고 불리는 조용한 산책길을 왕처럼 오르내리며 걸어보았다. 

광릉을 마치고 다시 광릉숲길의 나무데크길을 걷는다. 

도깨비와 요정들의 숲정원이라하며 꾸민 모습이 재밌다. 

국립수목원, 예전에는 광릉수목원이라 불렸다. 

경로가 적용되어 무료이며 차량을 갖고올 경우에는 예약이 필요하다. 도보객은 예약이 불필요.

수목원을 큰원을 그리며 시계바늘 방향으로 답사하였다.

전철 첫차로 움직였으니 잠시의 휴식이 필요하여 육림호 곁의 숲속 카페에서 라떼와 찹살떡으로 간식

어릴때 식목일이면 산에 나무를 심으러 갔던 기억들이 있다. 

그 노력들로 지금은 대한민국 국토 전체가 푸르다.  

이러한 산림녹화를 진두지휘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그리고 수목원이 그 시발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식수하였던 은행나무가 크게 높이 자랐다.

1927년 월정사에서 가져온 전나무 묘묙을 심어 지금은 울창한 전나무 숲으로 변모었다. 

남대식물원

산림녹화에 기여한 분들에 박정희 대통령도 포함되었다. 

국립수목원을 나와 광릉숲길 나무데크를 따라 다시 봉선사 입구까지 걸었다. 

전체 16km, 6시간을 꼬박 걸었지만 너무나 상쾌한 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