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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출처 차클 딥 다이브 유홍준 강의

클리오56 2022. 12. 1. 23:42

* 200년전의 한류스타: 추사 김정희

=> 시와 문장의 대가, 하지만 서체에 가려진 그의 진면목

=> 드라마틱 했던 그의 삶,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인생은 더 깊어지고 예술은 더 높은 경지로 

 

 

8살때 부친에게 보낸 편지와 부친의 답신

 

 

* 금석학 연구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다.
=> 즉, 입고는 법도를 떠나지 않는 것, 출신은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것. 
=> 통신시설이 부족한 시대에서도 국제학계에 뒤처지지 않고 교류한 추사
=> 후지즈카 '추사는 청의 영향만 받은게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한 학자였다'
=> 유홍준' 우리가 신문물을 받아들일 때 어떤 자세를 보여야하는 가를 추사가 보여준 것'
중국냄새가 많이나 기름기 좔좔,
즉 받아들일 때 초창기에는 비슷하게 간다.
모더니즘의 신풍을 몰고 온 추사
'옛것을 좋아해 때때로 부서진 비석을 찾았으며
경전을 연구하느라 시를 짓지 못했다'
好古有時搜斷碣 (호고유시수단갈),
硏經累日罷吟詩 (연경누일파음시)
 <송창석정> 김정희. 각폭 120.0×29.0cm. 개인 소장
 
추사 40대 중반 혹은 말기 작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옹방강체에 동기창, 유석암체 등 각 선학들 자체의 장점들을 취한 후, 이러한 장점들을 가미하여 섞어 쓴 작품으로 추사체 완성의 전조가 확실하게 보인다.

협서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추사가 연경을 방문했을 때 옹방강의 석묵서루에서 이 글씨를 보았고 그 필의筆意를 좇아 쓴 대련 행서이다. 중후하면서 도 율동미가 넘치고, 강한 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어디 하나 막히는 곳 없이 물 흐르는 듯한 매끄러운 행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전거사靑篆居士’라는 관서가 눈길을 끈다.
본문 좌우에는 작은 글씨의 협서(脇書; 본문 옆에 따로 기록한 글)가 행서(行書)체로 기록되어 있다. 협서는 '죽완(竹琬)'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에게 대련을 보내며 쓴 것으로, 예서에 대한 김정희의 시각이 간명하게 드러난다. 다음은 협서의 전문이다.

'죽완은 이를 감상하고 평해주길 바랍니다. 요새 예서 필법은 등석여를 으뜸으로 여기나 그의 장기는 전서(篆書)에 있습니다. 그의 것은 진대(秦代)의 태산(泰山; 태산각석)과 낭야(琅邪; 낭야대각석)를 따르면서도 끝없이 변화하니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요. 예서는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 이병수(伊秉綬, 1754~1815) 는 예스럽고 신비하긴 하지만 그도 옛 것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니 예서는 오봉(五鳳, 기원전 57~54), 황룡(黃龍, 기원전 49) 시대의 글자를 따르고, 촉비(蜀碑)를 알맞게 고려해야 바른 길로 갈 것입니다.'

김정희는 서예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예서에 주목하였고, 예서 중에서도 정제되고 세련된 동한시대 팔분(八分)보단 전서의 필의(筆意)가 돋보이는 소박한 멋의 서한시대 고예(古隸)를 좋아하였다.

해당 작품은 김정희의 여러 대련 필적 중에서도 그의 장점이 잘 살아있다. 외형이나 기법에 집중하는 대신 건조하고 거친 느낌을 주어 김정희가 지향했던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First Edition (kyukim68)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뒤에 위치한 화암사는 경주 김씨의 원당.
그 절 뒤의 병풍바위에 새겨진 글, 천축나라의 옛 선생, 즉 석가모니 => 당나라 시인 왕유가 먼저 사용했던 표현
시경:  송나라 시대 사학자이자 애국시인 육유의 대표적인 작품 => 비교하면 추사가 왜 월드 베스트인지 알게된다 

추사가 아들(첩에서 얻은 상우)을 위해
좌측의 동몽선습 책을 직접 또박또박 필사하고
우측은 아들에게 남긴다는 언급
=> 배울 때는 정확하게 배우라는 의미, 송곳으로 철판을 뚫는 힘
추사가 다산 정약용에게 수선화 선물
출처: 조선일보 '지금 제주는 수선화 천국' 제주행플특별취재팀 입력 2020.02.22 03:00
제주에서 수선화는 과거에는 애물단지 잡초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흔했지만 먹을 수도 없으니 귀찮은 존재였다.
그 가치를 되새겨준 사람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

추사는 24살 때인 1811년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처음 수선화를 알게 됐다.
당시 수선화 자체가 조선땅에서는 귀한데다, 선비들의 취미중 하나가 수선화 구근을 키우는 것이었다.

다산 정약용과 교유하던 김정희는 43세때인 1828년(순조 28년) 10월에 수선화 분재를 당시 67세였던 다산에게 선사했다.
추사가 평안 감사로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연경에서 온 사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수선화를 분재하여
가을에 정약용에게 보낸 것이다. 24년의 나이차를 넘어 꽃을 주고받는 선비들의 그윽함이 오랜 울림을 남기는 장면이다.


정약용은 이 분재를 받고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에서 수선화 한 포기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 시대 고기(古器)이다'라는 시를 여유당전서에 남겼다.

이 시에서 정약용은 수선화를 '검은 물도 들지 않고 닳지도 않은' 대은(大隱)의 군자를 상징한다고 표현했다.
또 한참 나이어린 김정희를 '벗'이라고 부른 것도 정겹다.

이후 추사는 54세때인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돼 8년 3개월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수선화를 흔하게 접하게 됐다. 그는 그때 '수선화 부(賦)'를 남기면서 다시 수선화 예찬을 이어갔다.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부(水仙花賦) 탁본.

연못에 얼음 얼고 뜨락에 눈쌓일 무렵

모든 화초가 말라도 너는 선화(仙花)처럼 향기를 발산하여
옥반(玉盤)의 정결을 펼치고 금옥(金屋)의 아리따움을 간직한다
꽃망울 노랗게 터지고 조밀한 잎 파릇이 피어나면
고운 바탕은 황금이 어리네


자신의 호를 딴 문집 '완당집'에서도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입니다.
이곳(제주)에는 촌리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송이 많게는 십수화(十數花), 팔구악(八九愕), 오륙악(五六愕)에 이르되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라고 적었다.
또 칠언시 '수선화(水仙花)'라는 작품에서는 수선화를 '해탈한 신선'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그윽하고 담담하고 냉철하고 빼어났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을 못 면했는데
맑은 물에 해탈한 신선(神仙)을 보겠네

이 시는 충남 예산의 김정희 종가 유물(전체를 1971년 보물 제547호로 지정) 중 하나인 서첩에 남아 있다.
시에서 김정희는 4군자중 하나인 매화보다 수선화를 더 높이 쳤다. 그만큼 추사의 수선화 사랑은 남달랐다.

수선화는 전 세계에 수천종이 분포해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품종이 유통된다.
제주에서는 금잔옥대 등 40여종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 봄, 제주도 수선화를 완상해봄직 하지 않은가.
다산의 수선화 시

신선의 풍모에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우리 집에 왔다

지난날 이기양이 사신 길에 가져오더니 추사가 또 대동강가 관아에서 보내주었다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고 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고 놀란다


다산은 시 끝에 부기로 추사가 평양에서 보낸 수선화 화분은 고려청자였다고 적었다.
추사와 다산에 대해 특별함을 알 수 있다.


1840년 추사가 55세에 유배 형벌로 제주도에 와보니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 수선화였다. 
그러나 이곳 농부들은 보리밭에 있는 아름다운 이 꽃을 원수 보듯이 파버리거나 소와 말의 먹잇감으로 사용한다.
추사는 이런 수선화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슬퍼한다.

* 중인, 역관들과도 깊은 교류

하늘이 내린 인재에는 남북이나 귀천의 차이가 없다. 천민신분의 초의 스님(편지 38통) => 차를 보내주지 않으면 염라대왕한테 얘기해서 몽둥이로 때리게 하겠어요~~~ 

 

 

* 추사의 귀양: 안동김씨의 모함에서 비롯, 암행어사 시절 안동김씨가의 관헌을 삭탈관직한데 대한 복수 => 우의정 조인영의 고언을 순조가 받아들여 제주로 위리안치 유배

 

까칠한 탓에 귀양살이
귀양길에 전주에서 창암 이삼만을 폄하.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이 분노한 제자들에게 한 말
'조선 붓에 조선 종이가 갖고 있는
순수한 맛은 모르는 것 같더라'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편액: 추사 이전에 최고의 서예가였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 

추사: 저 현판을 당장 떼시게, 내가 다시 써주겠소. 
귀양살이 중에 깊은 수양을 하여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 인생의 역경과 함께 무르익은 추사의 작품
=> 이것이 우리가 추사를 배워야하는 이유
(귀양가지 않고 동지부사로 연경에 가서 중국사람들과 만나고 왔다면 더욱 기고만장했을 것,
그러면 지금의 추사가 없었을 것)
=> 추사체는 제주 귀양살이 이후에 완성되었다
당대의 고승 백파스님 '선문수경'에 대한 비판 '백파망증 15조' (제주에서도 여전히 까칠한 성격)
=> 고형곤 교수의 무승부 판정
아내의 죽음 => 성격이 바뀌는 계기
제주의 아이들을 가르침: 대정향교, 제자 30여명

역관 이상적 => ?? => 명성황후 민씨 집안 => 후지즈카 => 소전 손재형 => 손세기 집안 => 국립중앙박물관 기탁

본디 예술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귀양살이에서 쓰는 글씨는 남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이 없이 쓰는 거니까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오롯이 홀로 글쓰기에 매진 할 수 있었던 시간. 긴 유배생활이 빚어낸 새로운 경지, 마음껏 개성으로 피어난 달라진 추사체 => 제주도 귀양후 완성된 추사체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내가 함부로 추사체를 흉내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9년간의 귀양살이 끝내고 귀향길

돌아가는 길은 속죄의 길
대흥사에서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제자리에 둠
백파 스님에게 사죄하려고 정읍에서 만나기로 약속,
하지만 눈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함
스님 계신 곳으로 큰절

차후 백파율사비에 글을 남김 
창암 이상만은 돌아가셨기에 묘비를 남김
재산을 모두 날리고 한강변에 작은 집에 기거
=> 먼 친척과 친구들 도움으로 가난하게 살아감
=> 이때 쓴 글씨가 추사체의 절정
추사의 걸작들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당호를 써달라고 부탁
'정약용을 보배롭게 여기는 산방' 

그 사람의 뒷동산이 조그맣기에
산 글자도 조그맣게!!!
잔서완석루: 다헤진 책과 쓸모없는 돌이 있는 집

윗줄은 맞추고 아랫줄은 축축늘어진 것이 빨래를 널어놓은 듯 살아있다
소창다명 사아구좌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무르게 한다.

창을 창문 그림으로 표현
앉을 좌는 흑 토에 궁뎅이 두개
... 하지만 크기가 다른 엉덩이

 

추사의 난 작품
역대 소장가들이 도장을 찍음... 멋이기도 하고 진품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음
내 눈을 거쳐간 것은 내것



추사의 노력
철종 즉위후 다시 북청으로 귀양 2년 => 무르익어 감

* 추사의 말년 과천시절(과지초당)의 명작들: 소박한 삶의 가치

山崇海深 遊天戱熙海

慈妙庵 逍遙庵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최고의 요리는 두부와 오이, 야채를 넣고 푹 끓인 것이고

최고의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 함께하는 모임이다. => 소박한 삶을 찬미 =>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

촌사의 벽에 제하다
(쓸쓸한 노년의 삶 속에서 인생을 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