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한국관광 100선 (시즌 2013~2014)

(76) 속리산 법주사 (2019.8.27)

클리오56 2019. 8. 28. 08:12

 

 

 

속리산 법주사는 보은의 보물 덩어리다.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 일대에는 보은의 지방유형문화재가 절반 이상 있고,

그중 법주사에만 국보 3점과 보물 12점이 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그 이름에는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70~1980년대에는 설악산, 경주와 함께 최고의 수학여행지로 인기를 끌었다.

법주사는 여러 선조들의 사연이 서려 더욱 위풍당당하다.

홍건적의 침입 때는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란 왔다가 환궁하는 길에 들렀고,

조선 태조는 즉위 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병에 걸린 세조는 법주사 복천암에서 사흘 동안 기도를 올렸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정유재란 때 승병의 본거지였던 법주사는 왜군들이 불태웠으나

그후 사명대사가 중건을 시작해 현재의 모습을 갖춘다.

법주사에 갈 때는 천연기념물 정이품송, 속리산 은폭동계곡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속리산 법주사 (2019.8.27)


속리산과 법주사를 찾지 않은 사람이 누가있겠냐마는, 더우기 나의 신혼 여행지라~~

당시에는 제주도가 신혼여행지로 뜨고 있었는데

사실 제주도는 가 본 적이 있어 피하다보니 초행지인 속리산을 선택.


속리산은 자체 산행도 있었지만 백두대간, 한남금북정맥 등 목적 산행으로도 찾았고

충북 일대의 산군이 만만치 않게 험했다는 경험이 지금도 기억.


다행히 이번엔 법주사를 찬찬히 둘러보는 일정이라

큰 부담없이 국보와 보물 등 유적을 감상하고 수려한 주변 풍경도 찾아보니

은퇴후 이만한 즐거움이 또 어디있으랴.


법주사에 들어가려니 주차비를 징수하는데 나중 입장료도 별도로 받으면서 웬 주차비,

하여 인근 천변에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병렬 주차시키고.

마침 비수기 평일이라 전혀 혼잡하지 않더라.  



보은 속리 정이품송

(천연기념물로서 초등시절 교과서에서도 나온 수령 600년의 명품 소나무,

높이 16.5m, 둘레 5.3m라는데 예전의 훨씬 풍성했던 모습은 아니라 아쉽고.

세조와의 인연으로 정이품의 품계를 받았다는 이야기)


세조길 자연관찰로

(정이품송과 세조의 인연으로 둘레길 이름이 세조길인 듯)


법주사 일주문

(현판에 '호서제일가람'이라 쓰였는데 호서는 호수의 서쪽이니

제천 의림지의 서쪽, 즉 충청도를 의미하고 충청도의 으뜸가는 사찰이라고 자랑

* 그런데, 호남이라고 할때는 그 호수가 김제의 벽제골을 가리키든데....)



법주사 부도전

(한자로 浮屠殿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보통 소박하게 밭 전田을 사용하지만 전각 등 건물도 없으면서

대궐 전殿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스님들도 속세처럼 뭔가 있어보이려는 의도?

아니겠지, 선각자들을 대우하려는 차원, 하지만 모두 새 것처럼 보여서 사진만 찍었다)




벽암대사비

(법주사를 크게 중창하신 분이라는데, 이 분을 굳이 여기 소개하려는 이유는

임진왜란 때는 해전에 참여, 인조 때는 승군을 이끌고 3년간 남한산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때는 승군 3천명의 항마군을 조직하여 진군했으나 도중 전쟁이 끝났고

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일생을 보내셨기에)


금강문


마애여래의좌상: 보물 제 216호

(안내 설명: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높이 6m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졌으며,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의좌상이며,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뚜렷한 눈두덩, 꽉 다문 입술, 길다란 귀 등 고려 초기 마애불 특징.

넓은 어깨에 비하여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



능인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안내 설명: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능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널리 이로움을 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어졌다.

이 곳에서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또 좌우로는 각각 8구씩 도합 16나한상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624년 인조 때 벽암대사가 중창하였다.


** '리군의 작은 공간'이라는 네이버 블로그에 따르면

능인전의 자리가 원래는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었고,

이러한 상황을 계승하여 능인전의 석가여래불 뒷편에 위치한 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겠끔 만들어놔서

능인전은 적멸보궁과 법당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고 한다.

=> 아래 사진에서도 석가여래불 뒷편으로 세존사리탑이 보인다.


세존사리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안내 설명: 이 사리탑은 1362년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중

법주사에 행차하여 양산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1기를

법주사로 옮겨와 봉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탑은 8각을 기본 형태로 하여, 상중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기단부와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

그리고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간략한 상륜부로 구성된 팔각원당형의 사리탑으로 높이는 3.5m이다.

이러한 형식의 사리탑은 고려말기~조선초기의 승탑에서 유행한 형식으로

탑신의 몸체가 공모양으로 바뀌고 지붕은 처마 끝이 둔중해지며 지붕 위의 경사도 날로 심해지는 경향을 띠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 사리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석련지(石蓮池): 국보 제 64호

(안내 설명: 신라 성덕왕 때인 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높이 1.95m, 둘레 6.65m의 희귀한 석조조형물.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당간지주(幢竿支柱)

(은퇴해서 시간 날 때 이리저리 찾아보며 공부 좀 해보니,

당(기 당幢)은 법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절에 다는 깃발을 말하고

간(장대 간竿)은 그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

지주(支柱)는 기를 단 장대를 고정하기 위한 지지대로 통상 두 개의 지주석이다.

대체로 당은 천으로, 간은 나무로 만들기에 거의 사라지고

지주는 돌이나 드물게 철로 만들기에 남아있는게 많다.

법주사 당간은 철로 만들었졌는데 대원군 시절 당백전 만들면서 금속물이 수거되었고

이후 1920년 높이 22m로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고, 1972년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석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70호

(안내 설명: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조로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쌀 80가마니를 채울 수 있는 부피, 통일신라시대 작품)


금동미륵대불: 2002년 복원

(처음 볼 땐, 법주사에 어울리지 않게 왠 금불상하며 냉소를 지었지만,

연혁 설명을 읽어보니 776년 신라 혜공왕 시절에 진표율사가 조성하였는데

대원군 시절 당백전 화폐를 주조한다며 불상을 몰수해갔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사실로 벌어졌다.

이후 시멘트불, 청동불을 거쳐 금동으로 새롭게 조성된 것이라하니 불상 하나에도 에환의 역사가 스며있다)


천왕문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 55호

(안내 설명: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처음 건립되었고,

그후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사명대사가 주관하여 1626년 인조 때 다시 지었으며

1968년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였다.

5층 목조탑 건축으로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이며

내부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8장면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모셔져 있어 팔상전이라고 부르게 된듯하다.


여기서 나의 무식이 드러났는데 여태 8각이라 팔상전인 줄 알았고

그런데 8장면 그림이라면 팔상전(捌相殿)의 팔은 여덟 八이 되어야지 않나?

근데 왠 다른 팔? 깨뜨릴 捌? 결국 한자 사전을 찾아보니

이 깨뜨릴 捌이 여덟이란 뜻도 갖고 있어 八, 捌은 같은 뜻이라고 함)





석등

(울타리까지 쳐있어 역사가 있는 듯 한데 안내설명이 없더군요)


쌍사자석등(국보 제 5호)

(안내 설명: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720년 신라 성덕왕 때로 추정,

높이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조각이 올려져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국보의 숫자가 순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5번이면 엄청 앞인데....)


대웅전 과 사천왕 석등


사천왕 석등: 보물 제15호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765~780년 신라 혜공왕 시절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다시 고쳐 지을 때의 작품으로 추정.

높이 3.9m의 대형석등으로 화사석은 8각, 4면에 창을 나머지 4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

지붕돌 정상에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받침이 남아있다.


인터넷 검색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옛 사진을 보면 전각 안에 보호되어 있는 듯한데

이렇게 제자리 모습보면 훨씬 좋아보이지만 보호 측면에서는 어떨지?

하긴 그것까지 고려해서 바깥에 모셔졌겠지요)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안내 설명: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776년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후 1624년 인조 때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이 약 19m의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이다)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 1360호

(안내 설명: 대웅보전 내부에 안치되어있으며, 

높이 5.5m, 허리둘레 3.9m의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는 가장 크다고 알려짐.


인터넷상의 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석가불이 정좌한 삼세불상이다.

방형의 장중한 형태와 굴곡이 거의 없는 평면적인 신체 조형은 17세기 양란 이후 조성된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부전, 삼성각


출입금지된 수행처



선희궁 원당: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1765년 영조 후궁 영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된 개인 사당 성격의 건물.

이 원당은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삼문을 두어 대웅보전 전면 동측에 다른 건물과 독립되어 있는데,

이러한모습은 향교, 서원 등에 자주 사용된 저녕적인 유교적 건축 형식)



철솥: 보물 제 1413호

(법주사 공양간 근처에 있던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으로

규모는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cm로 무게 20톤에 달함.

큰 사발형상으로 쌀 40가마 담는 규모로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 승도가 운집하여 있을 때 장솥으로 사용)



법주사 전경: 아마도 저 멀리 능선의 한 봉우리가 문장대 아닐까?


비구니 도량 수정암



수정암 부도


수정암 앞 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