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소감 및 내용
산에 관심을 갖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2005년 울산 근무 시절 부터이니 이제 14년째 산과 친구되었고 또한 그때부터 블로그에 글기록을 남기고 있다. 100대 명산을 다니다가 백두대간을 거쳐 정맥으로 이어졌고, 캐나다 근무하면서 록키에 접하여 트레킹에 빠졌다. 작년에는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도 다녀왔고, 아마도 세계의 유명 트레킹 코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동해안 해파랑길 등 장거리 도보도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아무튼 산이 있기에 그나마 삶이 조금이나마 윤택하지 않았을까. 항상 산에 감사한다.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등정이나 등산, 그런 개념보다는 선조들은 산의 경관을 즐기고 그 속에서 노니는 遊山의 개념 속에서 산을 즐겼다.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넉넉한 마음이, 그런 수양이 필요하고...
7 쪽: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내 생명의 뿌리들이 산에 묻혀 산이 되었으니, 내 몸의 DNA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우리에겐 산은 몸에 유전적으로 내장된 생명의 뿌리다. 큰 몸이다.
사람과 공간의 관계: 중국은 강, 황하를 어머니 강. 한국은 산, 지리산을 어머니 산.
=> 중국 문명이 강에서 꽃피웠다면, 한국 문명은 산에서 형성. 즉, 중국 풍수의 기원은 물, 한국은 산
8 쪽: 일본인에게 산은 신화의 현장, 산은 숭엄하고 두려운 존재. 산골짜기가 깊고, 산이 삶터와 격절. 화산.
반면에, 한국인에게 산은 설화의 현장. 산에는 사람의 이야기가 도란도란 담긴다. 옥녀봉 설화, 인자한 산신 할머니 등
=> 넓은 들판에 산이 없으면 이름이라도 붙임. 함안의 넓은 들에 大山리 마을 이름. 섬을 海山이라고도 부름.
9쪽: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遊山 전통: 둘레길처럼 여유롭게 산길 걷기
11 쪽: 우리에게 산천은 무엇인가? 시간은 흘러가버려 허망하기 짝이 없고, 공간은 무색으로 텅 비어 있어 무정하다. 그러나 산천은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그 무엇이다. 모두가 차곡차곡 저장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나는 산천을 거대한 메모리라고 생각한다. 역사도, 조상도, 자연생태도 모두 담겨 있고 또 앞으로 담길 그 무엇이다. 그 메모리의 일부로 나와서 살다가 다시 육신과 얼이 저장되는 거대한 생명 줄기에 접속해 있는 것이 우리가 아닐까?. 산의 保藏, 산천 메모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으로 돌아갔나 보다. 그렇게 산을 만났나 보다.
19 쪽: 主山, 공간 디자인의 중심. 主山은 客山에 상대되는 말이다. 주인에게는 손님이 있어야 하듯 주산은 객산을 마주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수평적 시선이다. 주산은 터를 펼치고 있는 뒷산이고, 객산은 맞은 편 너머에 주산과 대응하는 앞산이다. 한양에서 경복궁의 주산은 북악이고, 창덕궁과 종묘의 주산은 응봉이다. 객산은 관악산이다.
20 쪽: 고을과 마을에도, 집이나 묘에도 모두 主山이 있다. 또 主山은 祖山과 대응되는 말이다. 할아비산이 있어야 주산이 있다는 것이다. 산을 계통으로 보는 종적 시선이다. 한반도의 시조산은 백두산이고, 그 아래에 수도, 고을, 마을 등 모든 공간단위 마다 조산이 있으며, 그 줄기 끝에 주산이 있다.
22 쪽: 주거지를 정할 때는 지리적 조건을 가장 우선시했으며, 그 중에서도 먼저 주산을 염두에 두었다. 주산이 갖춰야 할 조건은 모양은 수려하고, 단정하며, 청명하고, 아담한 것이 제일 좋다. => 한양에서 경복궁의 주산은 북악이며, 북악(주산), 남산(안산), 관악산(객산) 세산을 기준으로 경복궁 공간구조의 축선이 결정되었다. 건물을 배치하고 방향을 결정할 때 주산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29 쪽: 鎭山, 산과 사람이 함께 진화한다. 진산은 한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다. 오늘날 행정단위오 시군마다 하나씩 지정되어 있었던 산이다. 지방 고을과 지역주민의 랜드마크 산인 셈이다. => 진산은 말 그대로 지키는 산이란 뜻. 지역과 삶터를 지키고 보호해주는 산.
30 쪽: 산의 눈으로 대동여지도를 보면 한반도가 큰 나무와 가지로 보인다. 뿌리는 백두산이고, 등줄기는 백두대간이다. 줄기마다 큰 가지가 뻗어 있다. 그 가지가 13개 정맥이다. 가지마다 다시 잔가지가 나와 있고 잔가지 꼭지마다 열매가 달려있다. 그 열매가 330여개의 고을이고, 꼭지가 바로 진산이다.
31 쪽: 신라는 중요한 산을 제 군데 골라 鎭이라 부르고 제사지냈다. 고려 왕실에서는 송악산, 조선 왕실에서는 삼각산을 왕도의 진산으로 삼고 소나무도 가꾸며 훼손되지 않게 관리했다.
39 쪽: 造山, 형태는 달라도 기능이 같은 산의 상징. 돌무더기, 숲, 장승, 솟대, 남근석 등의 모습으로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 등에 지은 산. => 자연과 대립하거나 격절된 인공이 아니라, 자연을 슬며시 잇고 相補하는 조화이다.
=> 숲 조산: 남원 운봉읍 행정리의 서어나무 숲. 마을 북쪽이 트여있어 숲을 조성해 산을 대신하였다.
43 쪽: 2007년 산림청 조사 발표. 우리나라의 산은 모두 4,440개
51 쪽: 身山不二 아이콘, 태봉산. 태를 산봉우리에 묻게 된 것은 풍수사상의 영향인데, 땅의 생기가 태에 전해져서 다시 그 태의 주인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믿음 때문. 조선왕실 태봉 대부분은 평지에 돌출하여 젖무덤처럼 생긴 봉우리 형태.
=> 62 쪽: 태반에서 탯줄이 태아에게 연결되듯 뒷산의 산줄기가 마을과 집으로 연결된다. 뒷산은 태반이요, 산줄기는 탯줄이다.
풍수에서 산을 읽는 방법: 오행의 시선
75 쪽: 어머니 산, 지리산
지리산이 왜 어머니산인지는 금강산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다.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지만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힘든 곳이다. 금강산 일대는 하천이 작고 농경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돌산이라 신앙의 장소인 절만 여기저기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옛사람들도 금강산을 절세의 미인이라고 했지 어머니로는 형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리산의 자연환경과 토양조건은 다르다. 흙산이라 경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풍부해서 벼농사도 지을 수 있었고, 산속에서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논밭을 갈며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산이다. => 지리산을 상징하는 아이콘은 聖母天王. 예전 천왕봉 정상에는 성모당이 존재
83 쪽: 침묵으로 엎드린 할머니 산, 한라산
2010년 한국갤럽 조사: 한달에 한번 이상 산에 가는 등산인구 1,800만명
=> 91 쪽: 왜 한라산신의 아이콘은 할머니이고 지리산신은 어머니였을까? 주민이 자연과 관계 맺으면서 빚어진 상징 이미지의 산물이 자연설화라고 해석할 때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할머니가 나를 있게한 모계적 근원이고 간접적으로 돌보는 존재라면 어머니는 나를 직접적으로 낳고 기르는 존재이다. 한라산과 지리산의 경관 이미지가 그렇다. 제주 사람들에게 한라산은 늘 거기에 있으면서 생명과 존재의 근거가 되는 상징 경관이다. 지리산과 달리 실제적으로 그 속에 생활터전을 마련하여 어미 품 속의 자식처럼 사람이 생육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화산 지형의 한라산지는 물이 부족하고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에 인구와 마을이 극히 적다. 그래서 어머니산이 아니라 할머니산이다. 한라산은 우리네 할머니가 그렇듯이 온갖 삶의 신산을 겪고 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지켜보는 산이다.
94 쪽: 빼어난 미인, 설악산
산이 미인이려면 돌산이어야 한다. 그래야 멋있고 화려하다. 풍화가 잘되는 화강암 산지가 그렇다. 봉우리가 우뚝우뚝하고, 기암절벽이 여기저기 위용을 다투며, 계곡은 이리저리 휘돌고, 폭포는 세찬 물줄기를 내리꽂는, 그야말로 다채로운 산악경관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져야 한다. ...게다가 돌의 색깔도 밝은 흰색이면 더욱 좋다. 그래서 설악은 미백미인이다.
105 쪽: 옥녀봉
옥녀봉의 이미지: 옥처럼 마음과 몸이 정결한 여인 처녀산, 수적으로 가장 많고 가장 일반적인 산 이름, 봉긋한 산의 생김새, 마을을 수호하는 여산신, 질투(시집간 여인이 옥녀봉에 오르면 동티가 난다), 다산을 상징,
115 쪽: 마이산
마이산에 대하여 '하늘 밖으로 떨어진 기이한 봉우리, 뾰족한 한 쌍이 말의 귀와 같네' 혹은 '봉황이 부리를 일으킨 듯, 용의 귀가 잠긴 듯'하며 구경의 대상으로 보고 놀람과 감탄으로 반응하는 패턴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활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마이산은 부부와 부모로 은유되는 가족 관계의 산이었다. 주민들은 마이산에 대해 이러한 혈통 의식을 품었다. 비록 보이는 모습이 칼처럼 사납든, 못생긴 곰보이든, 흉측한 남근석이든 아무 상관없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기괴하게 보이던 산은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산이 되었다. 일상적인 생활경관이 되었다.
조선산도(1903)에 표시된 백두대간 산맥과 주요 명산
137 쪽: 용인가 산인가, 계룡산
용은 서양인에게 퇴치해야 할 적대적이고 난폭한 괴물이고 어둠과 죽음이며, 아직 어떤 형태를 획득하지 못한 것의 상징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라는 질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용을 정복하여 토막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면 동아시아 사람들은 용을 공통적으로 물의 신으로 간주하여 비를 기원하거나 풍어를 기원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상고시대에는 중국 역시 악룡, 독룡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나 점점 긍정적으로 변화해 용신 또는 제왕의 관념 등이 두드러진다.
한국 용 관념의 특징은 농경신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한국에서는 용이 비를 내려주는 신이거나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른다는 생각이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용에 의한 국가 수호나 미륵불 관념과의 복합 등도 한국만의 독자적인 특징으로 주목된다.
=> 특히 한국에서 용의 이미지가 좋게 나타나는 이유는? 용이 다름아닌 산의 상징이기 때문. 사람들의 심층 무의식에 산천이 투사되어 이미지로 형상화 된 것이 용이라는 것이다.
계룡산이 새 왕조의 도읍지 후보가 되고, 정도령이 새시대를 열만한 산으로 지목된 큰 이유도, 휘돌면서 생명의 기운을 뿜는 계룡산의 모습에 있었다. 조선의 왕조와 민중은 동시에 계룡산에서 새 시대의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147 쪽: 비봉산 문화생태
조선시대 250여개의 지방 진산 중 에서 가장 많은 산이름이 비봉산이다.
=>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를 이루고, 비봉산 아래에는 인물이 난다는 믿음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옛사람들의 비봉산 인식은 풍수적, 심리적, 사회적, 경관적 필터가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이다. 풍수적으로 산은 봉황이라는 형국과 기운을 띤 유기체적인 대상으로 인지된다. 봉황 이름이 붙은 산에는 어김없이 비봉귀소형, 봉소포란형 등의 봉황 명당이 있다. 심리적으로 봉황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 산에 투사되어 동일시되는 과정을 거친다. 사회적으로 비봉산이 진산으로 공식화되면서 향촌공동체 사이에 공유지식이 되고 태도의 합의가 형성된다. 경관적으로 대나무 숲 등과 같은 봉황산과 관련된 파생경관이 형성되어 실체로서 공고해지는 메커니즘이 형성된다. 이 모두를 한마디로 비봉산 문화생태의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159 쪽: 거북이산 스토리텔링
우리의 거북 이미지는 길상의 상징이기도 하고 水神이기도 했다. 특히 산과 바위 지형에 투영되면서 공간적인 형상의 은유가 많이 생겨났다. 거북이는 우둔해서 토끼 꾀에 잘 속아넘어가기는 하지만, 끈기가 있고 진득해서 끝까지 경주하면 이긴다. 우리 설화 속의 거북 이미지이다.
전남 여수의 향일암은 땅의 생김새가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고 바다로 가는 모양이다. 원래 이름은 영구암이며, 신령스런 거북이산에 들어선 절이다 구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산 이름도 절 이름도 모두 거북이다. 치솟아 있는 불산을 마주한 고을에서 거북이라는 수신으로 화기를 진압하려 했던 것이다.
풍수학자 최창조 선생은 우리 국토를 "대륙의 동북쪽으로 향하여 서서히, 줄기차게 기어오르는 거북"으로 비유한 적이 있다. 그 말이 기억나 한반도 지도를 볼 때마다, 푸른 산천을 등에 지고 금빛 햇살을 받으며 오르는 거북이를 떠올려보곤 한다.
169 쪽: 호랑이산 생활사 코드
화전은 고대적 농경방식이지만 조선 후기까지도 그 규모가 평전과 비슷했다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화전을 해서 먹고 살았다. 이 화전민들이 호랑이에게 입은 피해가 극심했으며, 호식총이라는 독특한 장묘 풍습이 그 생활사의 흔적이다. 호랑이에게 당한 유해는 화장하여 그 자리에 돌무덤을 만든다. 그리고 시루를 엎어 놓고 쇠젓가락을 꼽는다.
풍수에서 백호는 명당터를 보고 순하게 쭈그려 앉은 모양새가 좋다고 보았고, 왼편의 청룡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거나 높으면 좋지 않다고 해석했다.
가뜩이나 호랑이가 무서운 판에 호랑이처럼 사나운 산이 있어 위협적으로 보일 때는 제압했다.
=> 시흥의 호암산 아래의 호압사 절. 호압사는 호암산의 꼬리 부분을 마주하고 입지했다. 인근 상도동에는 사자암도 있다. 사자로 호랑이를 경계하려는 뜻이다. 활의 역할을 하는 궁교도, 호암산에 남아 있는 돌개도 호랑이 산을 교ㅕㄴ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호암산에 대한 삼중, 사중의 안전장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일제강점기 때 고토 분지로가 한반도의 형상을 토끼로 비유하자 최남선이 발끈하여 호랑이 지도를 그렸다. 무한한 포부와 용기로 아시아 대륙과 세계에 웅비하려는 맹호라고 했다. 호랑이 산 코드가 호랑이 한반도로 비전업된 것이다.
179 쪽: 물고기산이 품은 수수께끼
물고기가 신앙이 되는 것은 항상 눈을 뜨고 잇어 재액을 방비해주고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벽사의 상징인 것이다. 물에서 자유자재로 지내는 물고기는 물을 관장하는 수신으로서 신의 성격도 띤다.
=> 김수로왕릉 입구 현판의 두 마리 물고기가 파사석탑을 마주 보고 있는 문양, 김해 신어산, 밀양 만어산 돌너들
191 쪽: 꽃뫼와 연화산의 미학
산과 꽃의 인문학적, 미학적 만남이 있었다. 꽃은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상징과 기호의 아름다움을 피웠다. 우리 산 가운대 꽃뫼와 연화산도 그렇다 => 북한산(화산), 금강산, 화산(정조), 안동 하회마을 화산, 고성 연화산
고성 연화산은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불과했지만 이 이름을 얻은 후 연화장 정토세계로 탈바꿈했다. 불교적 세계관은 이 산에 새로운 공간적 패러다임을 창출했던 것이다. 남쪽 시루봉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열린 전망이 탁월하다. 남으로는 푸른 남해바다가 눈앞에 아련하고, 북으로는 지리산 주능선과 합천 황매산도 보인다. 사천의 와룡산도 손에 잡힐듯 가까이 있다. 산에 절이 들어서고 토착화되면서 여러 산은 연꽃으로 상징된 불국정토의 표상이 됐다. 연화산, 부용산, 연화봉, 부용봉 등이 그렇다.
215 쪽: 한국인의 산천유전자, 태백산과 마니산
한국사람을 대표하는 유전자는? 아마도 우리가 유난히 산에 끌리고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산천유전자의 발동으로 이해된다. 산천은 단지 물리적 자연지형만의 산천이 아니고, 사상과 정신, 역사와 문화, 삶과 생활, 조상의 살과 뼈 그 모든 것이 엉겨서 일체가 된 무엇이다.
태백산과 마니산은 산천유전자가 가장 순수하게 보존된 랜드마크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지, 겨레 얼의 줏대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두 산을 찾을 일이다. 여기는 내노라하는 불교의 절도, 유교의 서원도 없다. 눈에 띄지 않는 고유신앙소와 당집들만 군데군데 있을 뿐이다. 아무리 강력한 외래종교와 문화도 이곳만은 차지하지 못하였다. 두 산은 민족신앙과 겨레정신의 순수한 보루인 것이다.
태백산: 이중환 '나라의 큰 명산중 하나', 신경준 12명산, 성해응 동국명산기, 도참비결서 한반도 으뜸 산, 환웅의 신시 가능성
마니산: 간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전설, 참성단, 하늘 제사
=> 공통적으로 단군, 제사 지내는 제단 (천제단, 참성단)으로 단군의 자취가 서려있는 고유신앙의 메카
227 쪽: 부처가 된 산, 영축산과 가야산
대승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토착화되자 중국에서 그랬듯이 명산을 택하여 사찰이 들어섰다. 산에 부처와 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인식도 그때부터 생겨났다. 산은 깨침의 길을 수행하는 장소이자 신성한 영역이 된 것이다.
통도사의 영축산 이름은 부처가 깨달은 뒤 설법한 산으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 도읍지인 왕사성(현 라지기르)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다. 기사굴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정상에 수리바위가 있어 한국과 인도의 두 산의 생김새가 서로 닮았다. 해인사의 가야산 역시 부처가 깨달았던 보드가야에서 유래했다는데, 라지기르의 영축산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동국여지승람: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에 감응되어 대가야왕과 금관가야왕을 낳았다고 한다. 이곳 가야산은 가야 개국설화와 시조신화의 현장인 것이다. => 한국의 3대 성모산신: 지리산 천왕성모, 가야산 정견모주, 경주 선도산 선도성모
235 쪽: 오대산 패밀리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동자 머리를 튼 천진한 어린이 보살상. 세조가 오대산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등창이 나았다는 설화와 연관.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가 1466년에 조성해 모셨음.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본산.
문수산, 길상산, 오대산, 청량산, 사자산은 명칭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서로 다른 산이지만문화적으로는 같은 갈래의 산 이름이다. 문수는 문수사리의 준말로 吉祥이고, 청량산(오대산)에 머물며, 사자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 이름은 화엉경에 있는 가상의 산인 청량산이 시조산이며, 중국 오대산을 거쳐 전파되었다. 일본에도 전파되었으니 범아시아적 산악문화의 소산이다.
245 쪽: 퇴계의 청량산, 남명의 지리산
청량산은 퇴계가 청량산인이라하며 마음을 둔 산이었고, 지리산은 남명 조식 덕에 더욱 빛나는 산이다. 두 사람은 조선 유학의 대학자이자 사상가로 양대 산맥.
봉화 청량산은 대승불교에서 문수보살의 청량산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퇴계에 의하여 불교의 명산에서 유교의 명산으로 성격이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불교적인 징표를 드러내었던 봉우리 이름들이 유교적으로 개명되기도 했다.
남명 조식은 합천에서 태어나 지리산에서 멀지않은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장년 시절 지리산을 십여 차례나 유람하였고, 61세이 이르자 천왕봉 아래 덕산에 정착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살다가 지리산 자락에 묻혔다.
산을 보되 눈에 보이는 경치로 보는 방식: 산의 절경을 감상하는 심미적 관점이다. 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태도를 보인다. 산에 노니는 것이라 등산이 아니라 遊山이다.
산을 보되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는 본보기로 보는 방식: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산을 보는 시선과 태도이다. 산을 통해 어짊을 함양하는 보람과 즐거움을 찾는다. => 공자 仁者樂山, 퇴계 讀書與遊山 (산을 유람하는 것은 독서와 같다)
산을 보되 사람과 세상까지 미루어 보는 방식: 산에서 살았던 역사 속의 인물과 시대적 상황을 함께 떠올리는 시선이다. 산에는 인물들의 자취가 서려있으며, 그 사람의 사회적 삶과 시대 상황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 불교의 특징을 산악 불교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 유교 역시 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 유교문화의 동아시아적 특징이 될 수도 있다. 유교의 종주인 중국도 태산학파나 주자의 무이산과 같이 산과 관련을 맺기도 하지만 한국보다는 정도가 덜하고, 일본의 유교는 아예 산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3 쪽: 덕유산 휴머니티
북덕유의 넉넉하고 덕스러운 품새, 남덕유의 장쾌하고 힘찬 골기.
동아시아에서 덕은 도를 행해 체득한 품성으로, 인격에서 으뜸으로 여기는 가치이다. 지도자도 덕장을 지장이나 용장보다 더 높이 치는 것처럼, 덕유산은 이름부터가 높은 격을 지닌 덕장의 산이요, 덕망 높은 이름임에 분명하다.
덕유산은 3개도 5군에 걸쳐 있는데 지정학적인 위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가야, 백제의 접경지가 되었다.
265 쪽: 산천 힐링, 무이산과 구곡
경남 고성의 상리면 무선리에 무이산(546m)이 있다. 들어서는 입구에서 보면 나지막하고 평범한 시골 뒷산 같은데, 산머리 턱에 올라 의상대사가 자리를 잡았다는 문수암에서 보노라면 물밀 듯 겹쳐있는 뭇 산들과 함께 한려수도의 그림같은 山海의 경치가 탁월하다. => 자연의 역동적 생명과 접속하면 심신의 자연성이 공명하면서 자연의 파동과 동조 효과가 일어난다. 자연 힐링.
한국 무이산의 원조는 중국 복건성과 강서성 경계에 있는 무이산. => 갖가지 모양의 봉우리와 기암이 파노라마처럼 우뚝우뚝하고, 협곡과 절벽 사이사이로 하천이 구절양장으로 구불거리면서 흘러간다. 이 무이산에 주자가 무이정사를 이루어 학문하고, 구곡을 경영하여 산천과 하나되는 삶을 살았다. 즉, 무이구곡은 동아시아 성리학의 요람이 되었던 것이다.
=> 구곡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몸과 마음을 쉬고 달래는 휴양지이자 힐링지이기도 했다.
277 쪽: 한국의 태산과 태산문화
중국의 태산은 해발 1,545m로 중국의 다른 산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상징적 가치와 역사적 비중으로 치면 중국의 명산에서 첫째가는 산으로 꼽힌다. 오악중 독보적으로 존귀하다 하여 오악독존이라고 했다. => 태산은 중화문화사의 축소판이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중구인을 대표하는 산, 화하문화의 발상지로 간주 => 국산, 대종
果然: 태산 정상의 바위에 있는 새김글. 태산을 와서 직접 보니 듣던 바대로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감탄
중국의 태산은 동아시아 산악문화에서 태산문화를 일으킨 진원지다. 한국, 베트남, 대만, 오키나와 등지에 동일한 산 이름, 예술작품, 관용어, 민속신앙 등 다양한 문화를 낳게 했다. => 티끌 모아 태산
공자의 고향인 곡부는 태산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으며, 공자로 인하여 태산은 천자가 봉선을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는 성스러운 하늘의 산에서 군자가 덕성을 도야하는 인지의 산이 되었다.
태산문화는 유교와 결부되어 조선의 지식인들에 의해 곳곳에 수용되었다. => 태산, 노태산, 니구산, 소니산 등
305 쪽: 國山의 정치학과 백두산
한국의 국산 백두산, 일본 후지산, 중국은? 태산(중국의 세계유산 1호), 혹은 곤류산(여기서 천하의 산줄기가 뻗었다고 믿음)
조선중기까지만도 한반도 산줄기의 근원을 중국의 곤륜산에서 찾았음 => 실학자들 백두산 조종설 제기
1962년 조중변계조약: 백두산 북쪽 45.5%는 중국 영토의 장백산, 남쪽 54.5%만이 백두산
북한은 김일성이래 백두산을 고도의 우상화 전략으로 활용
남북한 國歌에서 백두산이 등장하여 모두 강산 지향성, 일본은 천왕 지향성, 중국은 인민 지향성
317 쪽: 속리산 유토피아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한남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한다. 속리산에서 비롯한 물은 금강, 남한강, 낙동강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 삼파수라고 했다. 삼파수의 공간 이미지를 크게 떠올리면 바로 삼태극 아이콘이다. 그래서 속리산은 겨레정신이 발원하는 공간적 원점 자리이다.
조선시대 루복동은 낙토와 복지의 대명사로 여겨져 많은 민중이 여기서 생활터전을 일구었다. 그런데 속리산 우복동이 정확히 어딘지는 여러 설이 분분했다. 대체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장알=ㅁ리, 상오리 권역으로 추정. 속리산 우복동은 지리산 청학동과 함께 한국의 전통적인 유토피아를 대표하는 장소
- 속리산 우복동: 소의 뱃속과 같은 편안하고 넉넉한 골짜기 => 풍요로움이 묻어나는 복지의 생활형 이상향 => 농경지 넓고 비옥
- 지리산 청학동: 푸른 학이 날아 깃든 듯 청아하고 신비로운 골짜기 => 무릉도원 같은 승지의 신선경 이상향 => 논밭 협소 척박
327 쪽: 서울의 북악에서 통일의 조강으로
조선 후기에 신경준은 나라의 열두 명산 중에 삼각산을 첫번째로 주었다. "삼각산을 산의 머리로 삼은 것은 서울을 높인 것"
남북한의 사람들은 지척에 있어도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지만, 남북한의 산천은 조강으로 함께 만나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허브로 도약할 우리 산천에게 통일의 희망 메시지를 보내며.
339 쪽: 세계유산과 한국의 산
산성(남한산성, 한양도성 등), 산지 생활상(계단식 논), 산악신앙(마이산 산신제 등), 옛길(영남대로)... 가치있는 유산에 대한 보존, 지정
한국의 산과 산악문화가 새로운 인문적 세계유산의 가치로 온당히 평가되어 지구촌의 인류에게 소중히 간직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삶의 토대요 생명의 근원이자 영혼의 고향인 어머니산으로서 말이다.
책소개
산의 겨레, 한국인의 산을 말하다!
『산천독법』은 스스로를 ‘산가(山家)’로 지칭하는 산 연구자 최원석 교수의 저서로, 각각의 산과 산이 품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은 남성, 여성, 동식물에 비유되어 설화를 품는가 하면, 부처나 산신이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고, 공자나 주자로 비유되어 유교 사상을 구현하는 사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태를 묻은 왕실의 상징이 되고, 국토의 조종을 논하는 역사 논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저자가 자상하게 읽어주는 산 이야기를 들으며 산에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최원석은 1963년생. 서울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일본 중부대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경상대학교 인문한국(HK) 교수로 지리산권문화연구를 하고 있다.
같은 대학에서 명산문화연구센터장, 『Mountains & Humanities』 편집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한길사에서 출간한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2014)을 비롯하여, 다수의 저서와 공저, 논문 등이 있다.
목차
1. 삶의 한가운데서 산을 바라보다
주산, 공간디자인의 중심
진산, 산과 사람이 함께 진화한다
세상에 산을 만드는 사람들, 조산
산신불이 아이콘, 태봉산
더 읽을거리 1 살 만한 곳 고르기
더 읽을거리 2 풍수에서 산을 읽는 방법: 오행의 시선
2. 너와 내가 하나이니 산에 담긴 이야기
어머니산, 지리산
침묵으로 엎드린 할머니산, 한라산
빼어난 미인, 설악산
융프라우와 옥녀봉 사이
마이산 파노라마
더 읽을거리 3 산줄기를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
더 읽을거리 4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
더 읽을거리 5 산수 지도의 명작, 『대동여지도』
3. 용인 듯 봉황인 듯 산에 숨은 동물과 식물
용인가 산인가, 계룡산
비봉산 문화생태
거북이산 스토리텔링
호랑이산 생활사 코드
물고기산 수수께끼
꽃뫼와 연화산의 미학
더 읽을거리 6 산지 생활사, 화전농업과 호식총
더 읽을거리 7 삼신할미와 여성산신
4. 무궁무진한 이야기들 산에 담긴 생각
한국인의 산천유전자, 태백산과 마니산
부처가 된 산, 영축산과 가야산
오대산 패밀리
퇴계의 청량산 남명의 지리산
덕유산 휴머니티
산천 힐링, 무이산과 구곡
한국의 태산과 태산문화
더 읽을거리 8 험한 세상 피해 갈 십승지
더 읽을거리 9 지리산 유람록의 생생한 표정
5. 역사를 품에 안다 산과 사람들
국산의 정치학 백두산
속리산 유토피아
서울의 북악에서 통일의 조강으로
세계유산과 한국의 산
더 읽을거리 10 산성의 나라, 한국
더 읽을거리 11 그린벨트와 산림 관리의 원형, 금산과 봉산
사람 사는 곳엔 언제나 산이 있다 | 저자 후기
출판사 서평
지난해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으로 인문지리학의 기념비적인 성과를 낸 최원석 교수가 『산천독법』을 새로이 펴냈다. 전작에 비해 대중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쉬운 글로 돌아왔다. 산을 닮아 친절하고 다정한 성품을 가진 저자의 음성이 글에 그대로 묻어난다. 글을 읽노라면 마치 저자가 자상하게 읽어주는 산 이야기를 들으며 산에 오르는 것 같다. 최원석 교수와 함께 산을 만나러 가는 여정 그 자체이다.
책은 각각의 산과 산이 품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은 남성, 여성, 동식물에 비유되어 설화를 품는가 하면, 부처나 산신이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고, 공자나 주자로 비유되어 유교 사상을 구현하는 사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태를 묻은 왕실의 상징이 되고, 국토의 조종을 논하는 역사 논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산은 오르고 정복해내는 대상이 아니다. 품은 이야기를 읽어내야 하는 텍스트다. 산은 그렇게 인문학이 되었다.
최원석 교수는 스스로를 산가(山家)로 지칭하는 산 연구자다. ‘산가’는 풍수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지만 산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산’ 자체를 오롯이 연구해온 최원석 교수의 삶이 드러나는 단어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하면서 한국 풍수의 대가 최창조 교수에게서 풍수를 배웠다. 그러면서도 산에 마음을 빼앗겨 석사 때부터 산을 연구하는 독특한 행보를 걸어왔다. 근대적 학문인 지리학과 전통적 인문지리학인 풍수를 모두 전공했기에 상호보완적인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은 우리 산 연구자로서 최원석 교수가 가지는 큰 장점 중의 하나다. 다채롭게 산을 읽어내는 그의 폭넓은 시선은 이런 바탕에서 가능했다.
지난해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이 출간된 뒤, 강연과 신문연재 등 저자의 활동과 연구 폭은 크게 넓어졌다. 경상대학교 인문한국HK 교수인 저자는 책이 출간된 뒤, 경상대학교에 설립된 명산문화연구센터의 센터장을 맡게 되었다. 산에 관한 영문 학술지 『Mauntains & Humanities』의 편집장도 함께 맡았다. 산의 인문학이 대중과 한층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행보 중에 기획되고 쓰였다. 책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체제와 구성을 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연재했다. 연재 지면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에 산을 읽는 다양한 방법을 더하여 읽을거리를 더했다. 풍성한 현장 사진과 고지도, 옛 그림 속의 산수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마치 새처럼 그려진
『해동지도』 속 진보 비봉산
독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만어산 돌너덜
슬픈 옥녀의 설화를 간직한
통영 사량도 옥녀봉
용 머리의 모습으로 묘사된
『1872년 지방지도』의 계룡산
다채로운 우리 산 이야기
저자가 펼쳐놓는 산 이야기는 다채롭다. 지리산처럼 만물이 자라도록 하는 너른 품을 가진 어머니산이 있는가 하면 한라산처럼 장구한 역사의 부침을 말없이 견뎌주는 할머니산이 있다. 똑같은 처녀산이어도 우리에게는 매서운 융프라우와 대비되는 가녀리고 애틋한 옥녀봉이 있다. 기괴한 모습의 산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마이산 곁의 주민들이 있다. 용, 거북이, 봉황, 호랑이 등의 전설을 품고 있는 산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은 고지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 고유의 신앙을 품은 태백산과 마니산이 있는가 하면 부처의 상징이 되는 영축산ㆍ가야산ㆍ오대산이 있다.
한편 유교지식인들은 우리 산천도 유교적 교양을 키우고 수양할 수 있는 곳으로 삼았다. 스승이 머문 곳을 흠모하여 청량산ㆍ지리산 등에서 숱한 시를 남기고, 주자를 흠모하여 무이산과 구곡을 이 땅에 옮기고, 공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태산과 태산문화를 심었다. 저자가 하나하나 풀어놓는 이야기를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조선의 선비들이 글을 통해 산을 간접 체험했던 ‘유산’(遊山)이 이런 것이었던 듯하다.
우리 산천의 미래
둘레길 산행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작한 책의 마무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제5장 역사를 품에 안다」에서 저자는 우리 산천의 역사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백두산을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백두산 조종설을 비교해보노라면 동북공정의 일환인 장백산 논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인문적 세계유산의 가치를 가진 우리 산이 온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저자의 애타는 마음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피눈물 나는 역사를 함께해온 수도의 산들이 이미 포화상태이므로 그 대안이 될 새로운 수도로 경기도 조강 유역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조강 유역은 삼태극의 형상으로 너른 땅을 이루고 강으로 바다로 중국대륙으로 사통팔달하는 곳이다. 새천년의 산천 아이콘이 될 만한 곳으로 지목된다. 이 땅의 산은 굳건히 우리를 지키고 이 땅의 강은 도도히 흘러 우리를 아우른다. 우리 산천을 통해 역사와 미래를 읽어내는 산가 최원석 교수의 산천독법이다.
책 속의 다양한 우리 산 풍경들
지리산이 왜 어머니산인지는 금강산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다.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지만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힘든 곳이다. 금강산 일대는 하천이 작고 농경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돌산이라 신앙의 장소인 절만 여기저기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옛사람들도 금강산을 절세의 미인이라고 했지 어머니로는 형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리산의 자연환경과 토양조건은 다르다. 흙산이라 경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풍부해서 벼농사도 지을 수 있었고, 산속에서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논밭을 갈며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산이다.(75~76쪽, 「어머니산, 지리산」)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적인 관점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중국과 한국의 미인상은 같지 않고, 조선시대 미인과 현대 미인의 기준도 다르다. 산을 보는 눈도 그랬다. … 조선의 미인상은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그 기준을 잘 보여준다. 우선 몸은 통통해야 했다. 그래야 복스럽다고 했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코도 턱도 둥근 것이 미인의 조건이었다. 서구적인 미인형을 선호하는 요즘 남자들의 미인관과는 한참 동떨어진다. 유학자들도 빼어남보다 덕스러움을 더욱 칭송하였다. 조선시대 미인관을 기준으로 산을 보자면 석산보다는 토산을 선호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97~98쪽, 「빼어난 미인, 설악산」)
주민들의 생활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마이산은 부부와 부모로 은유되는 가족 관계의 산이었다. 주민들은 마이산에 대해 이러한 혈통 의식을 품었다. 비록 보이는 모습이 칼처럼 사납든, 못생긴 곰보이든, 흉측한 남근석이든 아무 상관없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기괴하게 보이던 산은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산이 되었다. 일상적인 생활경관이 되었다.
마이산의 기이함과 평범함의 사이는 얼마큼 멀고 가까운 것일까? 분별없는 평상심이 도道라는 선종의 깨우침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진안 주민들에게, 마이산이 저렇게 희한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묻는 이를 도리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빛으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마이산요? 그냥 산이지요.”(125쪽, 「마이산 파노라마」)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 불교의 특징을 산악 불교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 유교 역시 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 유교문화의 동아시아적 특징이 될 수도 있다. 유교의 종주인 중국도 태산학파나 주자의 무이산과 같이 산과 관련을 맺기도 하지만 한국보다는 정도가 덜하고, 일본의 유교는 아예 산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52쪽, 「퇴계의 청량산, 남명의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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