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한국관광 100선 (시즌 2013~2014)

(1) 경주 남산 (2005.11.19)

클리오56 2013. 3. 2. 07:01

 

 

"서라벌의 진산인 남산(468m)은 절터, 석불, 석탑 등 700여 점에 이르는 불교 유적이 있어 ‘경주의 노천박물관’으로 불린다.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빚어낸 작품들은 여행자가 내딛는 발걸음에 설렘과 흥분을 더한다. 하지만 남산의 멋이 불교 유적에만 있는 건 아니다. 40개가 넘는 남산의 계곡과 골짜기는 제각각 매력이 있어 등산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은 남산의 불교 유적과 아름다움을 직접 경험했을 때 비로소 경주를 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구분된다. 신라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나정과 포석정, 솔숲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삼릉 솔숲을 만날 수 있는 서남산이 신라가 태동한 성지라면, 미륵골, 탑골, 부처골 등 수많은 돌 속 부처를 만날 수 있는 동남산은 불교의 성지라 할 만하다. 남산에는 미륵골(보리사) 석불좌상, 용장사지 삼층석탑, 칠불암 마애석불 등 보물과 포석정지, 나정과 삼릉을 비롯한 사적 그리고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입골석불, 약수골 마애입상 등의 지방유형문화재가 남아 있다.

(추천 여행 코스)1일 차 : 경주 IC→남산 삼릉골 코스(삼릉~냉골석조여래좌상~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삼릉계곡 선각육존불~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금오산 정상~용장사지 삼층석탑~신선암 마애여래좌상~칠불암 마애불상군~남산사지 삼층석탑)
2일 차 : 나정→양산재→남간사지 당간지주→포석정지→지마왕릉→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경부고속도로 경주 IC→귀가

(전문가 팁)남산 삼릉골 코스는 남산의 7대 보물로 불리는 불교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코스입니다. 나정에서 시작해 포석정을 거쳐 경애왕릉까지 이어지는 코스(약 3km)나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에서 통일전을 거쳐 염불사지 삼층석탑까지 가는 코스(약 5km)는 하루 걷기 코스로 적당하죠. 혼가 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경주남산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경주남산달빛기행’에 참여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 산행지: 경주 남산의 금오산 471M (2005.11.19)
** 산행로:  삼불사(11:54)-상선암(13:30)-마애석가여래좌상-금오산정상(14:20)-용장사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삼륜대석불좌상-용장사터-설잠교-용장리(16:30)

 

** 초등학교 친구 2명

 
부산에서 온 친구 둘과 함께 울산에서 만나 경주 남산을 향했다. 느림보 산행을 주창하는 이선생과 최근 다리를 다쳐 여러 달 병상에서 입원 후 처음 산행에 나서는 황선생과의 산행이라 가파르지 않은 남산을 택한 것이다. 사실 남산은 처음이다. 천년 신라의 역사가 숨쉬는 남산이라 친구들의 해박한 불교지식과 사진 예술이 잔뜩 기대되는 유적 탐방이다.

 

 

삼불사-상선암-금오산 정상(11;54-14:20)

 

남산 인근의 원주각(?)이란 초가 식당에서 간단한 정식을 들고 삼불사로 향했다. 삼불사는 배리란 마을에 위치하는데 인근의 불상 세 개를 한 곳에 모아 보존하고 있었다. 이른바 배리 삼존불인데, 이 선생은 맑은 미소의 이 삼존불을 으뜸으로 여기고 이곳을 꼭 방문해야 한다며 산행의 기점으로 삼았다.  배리삼존불입상은 보물 63호이고 7세기 작품이다. 보호각 내부에 존치함으로써 특유의 미소를 잃어버렸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대두된단다.  문화재 보존이란 어려운 일이다.....여기서도 디카가 말썽. 용량이 다차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하지만, 이후 황선생이 솜씨를 발휘 할 것이다. 15년전 황선생은 거의 1년을 남산을 찾아 불상 사진들을 찍었단다. 그래서인가. 디카의 말썽은 전문가 앞에서 기 죽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배려? 

 

* 배리삼존불: 지금은 보호각 내부에 위치하며 아래는 그 이전의 사진 

 

배리(拜里)란 특이한 지명에 대해서도 인터넷 한 모퉁이에서 그 답을 주고 있다. 신라시대에 재상이었던 유렴이 아는 스님을 통해 한 스님을 소개받았으나 그 행색이 볼품없고 초라해 보통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유렴도 못 입고, 못 씻은 그 스님을 업신여겼단다. 그러다가 갑자기 스님이 소맷자락에서 나온 사자를 타고 날아가 버리자 이에 깨우침을 얻은 유렴이 그 스님이 날아간 곳을 향해 밤새 절을 하며 빌었다고 해서 "절하는 동네" 즉, 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나무에 솔잎은 다 떨어지고 솔방울이 유난히도 많이 달려있다. 남산은 많은 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그 수명을 다할 때 솔방울이 많단다.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들은 수명이 길지 못하고 마지막 종족번식을 위해 솔방울에 자양분을 공급하느라고...난초가 꽃을 피우면 마지막 순간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데, 식물에도 그 삶이 종족번식이란 대명제를 염두에 둔다는게 마냥 신기하다.


 

왜 남산에 불상이 많을까? 경주가 신라의 천년수도이고 한창 번영기엔 기와집이 15만채라하였으니 남산은 바로 고도 신라 경주의 앞산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제유불성이라 하였는데. 굳이 불상을 만들 필요가???? 조주 선사에게 어느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지를 물어 보았답니다. 부처님께서 제유불성,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은 위로는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곤충,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 말씀했기 �문이란다. 그러면, 굳이 불상을 만들지 않아도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님인데...어렵다....이런 무자화두를 던지며 계속 정진하는 것이 선불교라곤 하지만....얘기는 이어진다. 소설 만다라에선 병속의 새가 화두이다. 글쎄, 기억나는 것은 지순한 주인공과 대치되는 어느 스님. 누가 더 득도에 다가갔을까? 지순만으론 득도가 아닐테고, 오히려 진흙을 딩군 어느 스님이 아니었을까하는 희미한 기억 뿐...   

 

상선암에 이르러 이 선생은 암자에서 참배를 올리고 시주를 한다. 이번 수요일(11.23)이면 수능이라 더더욱 마음이 쓰이리라.  조금 더 오르면 상선암 마애대불이 나타난다. 커기도하지만, 탁트인 전망으로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인다. 바위에 새겨져 노출되어 있음에도 천년이상 풍파에 이겨왔음에 놀랍다.

 

* 상선암마애대불


인터넷 강상원의 역사교실에선 근엄한 풍채의 할아버지 불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고 있다.   

 

"지방 유형문화재 제 158호: 남산의 좌불 중 남산에서 가장 크고 조각이 우수한 마애석가 여래 대불 좌상을 볼 수 있다. 높이 7m, 너비 5m 되는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너비 4.2m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다. 불상의 전체 모습은 몸을 약간 위로 제치고 반쯤 뜬눈으로 속세의 중생을 바라보고 있어서 부처님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온 누리를 제도하는 듯 폭 넓은 기상을 보이고 있다. 얼굴과 어깨는 광배면에서 66.6㎝ 이며 높은 돌을 새김으로 사실적인데 비해 옷주름이나 손과 발은 부피 없는 선각으로 나타내있다. 사각에 가까운 머리는 풍만하고 가늘고 긴 눈은 정면을 내려다보는데 예리하게 다듬어진 코는 우뚝하며 굳센 기상을 나타내었고 굵어보이는 눈썹은 단정한 초생달 모양이다. 입술은 굳게 다물었고 턱은 군턱이지고 살찐 뺨과 입술 언저리에 조용한 미소가 숨겨져 있다. 삭발한 머리에 육계가 나지막하고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아있다. "

 

 

이 여래좌상 역시 아마추어의 눈에도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두는 거의 드러나게 조각되었지만, 몸통 부분은 새겨지고 특히 어깨 부분은 바위와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렸다.  광배에선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드러난다.  어떤이는 불교와 바위신앙이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순간을 표현하였다고 언급한다.

 

* 금오산 정상에서

 

금오산-용장사터-용장마을 (14:30-16:30)

용장사는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매월당 김시습이 설금이란 법명으로 지낸 사찰이며 이 곳에서 금오신화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을 탄생시켰다. 여태 금오신화의 금오가 구미의 금오산인줄 알았건만, 이곳 경주의 남산을 지칭하는 말일 줄이야. 용장사에는 세가지 특별한 유물이 남아있었다. 마애여래좌상, 삼층석탑 그리고 석불좌상이다. 마애여래좌상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섬세한 선이며 구름 위를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달빛에 비추어진 모습이 일품이라는데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 삼층석탑은 석가탑을 보는 듯하며 웅장하고 견고하지만 또한 섬세하다. 멀리 산 아래 계곡에서도 멋진 자태가 눈에 띄었다.  석불좌상은 불두부분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으며 원형의 좌대위에 설치된 점이 특이하다. 바라보는 방향이 반월성이란다. 특히 손부분이 항마촉지인로서 석가여래불로 여겨지지만 삼국유사 기록에는 미륵불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어 미륵불이란 설도 있다고 한다. 의상의 주름이 당나라 7세기 특징이라 8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단다.   (마애여래좌상의 사진이 없네요...다음 기회엔 꼭)  

 

* 삼층석탑

 

 

 

* 석불좌상: 불두부분이 훼손되어 떨어져나갔다.

 

 

* 산행 다음날 아침 기상하여 TV를 켜니 UBC방송에서 미륵을 주제로한 다큐이다. 내세가 아닌 현세를 강조함으로써 힘없는 민초들에게 다가가는 희망의 상징으로 미륵이 선호되고, 다른 부처님이 미륵으로 불리워지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사찰에선 분명히 항마촉지인이지만 미륵전으로 현판되어 있기도 했다. 미륵은 화려한 축복에서 벗어나 있고, 온전한 몸을 갖지 않고 있다. 많은 미륵의 없어진 코는 수태를 위해 코가 없어지도록 민초들은 미륵에 다가간다. 하지만, 어느 민초도 미륵의 코를 가져갖다해서 화를 입지도 않는다.  그만큼 미륵은 민중들에게 친숙한 것이다. 에전엔 미륵이란 말로 불상을 대체했다고도 한다.   

 

용장마을에 도달하였으나, 차가 있는 삼불사까진 30분 이상을 꽤 걸어야 한다. 택시를 부르려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 젊은 기사가 모는 트럭의 도움으로 세사람이 구겨앉아 삼불사까지 수월하게 도착했다. 

 

쇠고기로 유명한 봉계의 만객소래에서 고기와 맥주를 들곤 귀가...............

 

<문화재 설명 자료>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출처 야후 사전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남산(南山)의 용장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마애여래좌상. 높이 1.62m. 지상에서 높지 않은 앞면에 새겼으며 광배·대좌를 갖추고 있다. 머리 모양은 나발(螺髮)이고 육계의 표시는 분명하지 않다. 결가부좌로 오른쪽 발만 보이는 길상좌(吉祥坐)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을 다리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얼굴 형태는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이나 남산 미륵곡의 보리사석불좌상과 비슷하며, 특히 얼굴이나 체구·의문(衣紋) 등에서 굽타기(Gupta期)의 마두라불들과 강한 친연성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굽타불의 수용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불의(佛衣)는 통견의로서 매우 얇게 빚은 듯한 의습인데, 옷주름 선들을 일정하게 평행시킨 평행밀집의 의문은 9세기의 도식적인 의문과 달리 세련되고 유려하다. 전체적으로 긴장되고 활력에 찬 형태와 유려하고 세련된 선의 흐름, 깔끔한 부조의 아름다움 등 8세기 중엽의 난숙한 사실주의 불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913호.

 

 

삼층석탑(보물 186호)에 대한 설명: 출처 네이버 블로그 (행복리뷰)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자연암석을 바윗돌과 아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로 바로 윗층 기단이 올려져 있다. 즉, 자연암석이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윗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조각을 새기고 2장의 판돌로 덮어 기단을 마감하였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져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고 쇠막대를 꽂았던 구멍만 남아 있다. 쓰러져있던 것을 1922년에 재건하였는데 사리장치는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다우며 주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탑은 하층기단( 下層基壇 )을 생략하고 암석( 岩石 )에 높이 6cm의 괴임 한단( 一段 )을 직접 마련하여 상층기단( 上層基壇 ) 중석( 中石 )을 받게 하였다.

중석의 일면( 一面 )은 한 돌로 되어 있고, 다른 삼면( 三面 )은 두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면에는 모서리기둥( 隅柱 )과 탱주( 撑柱 ) 한 개씩을 모각( 模刻 )하였다.

갑석( 甲石 )은 2매판석( 二枚板石 )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에는 부연( 副椽 )이 있다.

갑석의 상면( 上面 )은 약간 경사( 傾斜 )져 있고, 그 상면 중앙에는 모가 난 2단의 탑신( 塔身 )받침이 마련되었다.

탑신부( 塔身部 )의 각 층 옥신과 옥개석( 屋蓋石 )은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초층 옥신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네 귀에 모서리기둥이 있을 뿐이고, 2층 옥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옥개석은 받침이 각층 4단이고 추녀는 직선( 直線 )이나 전각( 轉角 ) 상면( 上面 )에서 경쾌한 반전( 反轉 )을 보인다. 옥개석 상면에는 1단의 괴임이 있어 각각 옥신석( 屋身石 )을 받게 된 점은 일반 석탑에서와 다름없다.

상륜부( 相輪部 )는 전부 없어져 그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고 다만 3층의 옥개석 정부( 頂部 )에 찰주공( 擦柱孔 )만이 남아 있다. 각 부의 조화( 調和 )가 아름답고 경쾌하며 주위의 자연과 잘 어울리어 장관( 壯觀 )을 이루는 수법양식( 手法樣式 )에서 신라하대( 新羅下代 )에 속하는 대표적인 석탑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석불좌상(보물 187호)에 대한 설명: 출처 네이버 블로그 (행복리뷰)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목에는 3줄의 뚜렷한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는 넓지 않으며, 가슴 또한 풍만하지 않은 체구로 어떤 승려의 자세를 보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양 어깨를 모두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이 대좌(臺座) 윗부분까지 흘러 내리는데 마치 레이스가 달린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자연기단 위에 이형 3층탑이라 생각될 만큼 특이한 원형(圓形)인데, 맨 윗단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이 석불은 특이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주며, 『삼국유사』 에서 보이는 유명한 승려 대현(大賢)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명한 불상이다. 대현의 활동 기간에 제작되었다고 보아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좌상( 石佛坐像 )은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가까운 곳에 있는 8세기 중엽의 불상이다. 현재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다.

목에는 세 줄의 뚜렷한 삼도( 三道 )가 있고 옷깃은 오른쪽 어깨가 들어나게 한 우견편단( 右肩偏袒 )으로 옷자락은 맨 윗단의 대좌부까지 흘러내리듯 표현하였다.

왼손에는 보주( 寶珠 )를 얹고 결가부좌( 結跏趺坐 )한 모습이다.

특히 이 불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른 불상 대좌에서 볼 수 없는 중첩된 원형( 圓形 ) 대좌( 臺座 )를 하고 있는 점이다.

맨 아래에 자연석 기단부 위에 대좌받침과 원형대좌를 교대로 하여 삼층으로 중첩되게 만들었으며 맨 윗단의 둥근 원형대좌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