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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2025.2.7)

클리오56 2025. 2. 7. 11:04

내용 및 소감

발간 당시로는 미래소설이었던 헉슬리의 훌륭한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년이 기억난다. 이 두 소설은 태어난지 거의 100년이 되겠지만 이미 그 실현을 볼 수 있었으니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얼마 전 중국도 AI 기술로 딥시크를 보여주었지만 그 전에 챗GPT는 이미 검색의 수준을 몇 단계 진보시켰다. 작별인사라는 본 소설에서 인간, 인간을 복제한 클론(선이), 로봇을 진화시킨 휴머노이드(민이), 그 개량판으로 인간에 더욱 가까워진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철이)가 등장하며 인간과 로봇, 전쟁, 의식, 죽음, 불멸 등을 전개시킨다. 어찌보면 황당하지만 결코 황당할 수 없게도 곧 닥쳐올 미래이니 당황스럽다. 로봇은 기계라 영생할 수 있지만 인간은 필멸, 그 경계는 뇌이다. 우리의 미래 세계를 엿보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9쪽: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회상은 나의 일상이었다. 순수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던 시절, 나는 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기억을 이어 붙이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서 시작됐다. 
 
작박구리를 묻어주던 날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 27쪽: 완벽한 고양이 로봇을 만드는 것은 그의 오랜 꿈중의 하나였다. 개를 닮은 로봇은 양산되고 있었지만 고양이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립적이고 도도하면서도 인간의 사랑을 듬뿍 받는 로봇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런 로봇 고양이를 구매할까? 그는 꽤 오랫동안 취미 삼아 고양이 로봇을 설계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녀석이 바로 데카르트였다. 
 
- 29쪽: 나는 바깥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이곳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회사의 보호 아래 선택받은 소수가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아가는 일종의 섬이라는 것도 전혀 몰랐다.
 
- 30쪽: "저는 이제 데카르트가 로봇이라는 것도 자꾸 잊어버리게 돼요. 다른 냥이들의 행동을 학습에서 그런 거겠죠?"
"데카르트만 학습을 하는 건 아니야. 자세히 살펴보면 칸트와 갈릴레오도 데카르트의 행동을 보고 따라한단다. 그래서 결국은 서로 비슷해지는 거야 서로 닮아가는 거지." 

- 33쪽: “…노을 같은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는 그냥 감상하면 그만이야. 뭐하러 예측을 하겠어? 노을이 우릴 죽이는 것도 아닌데.”
“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네요.”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미래를 알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미래’라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에 달렸어.” 
 
- 37쪽: "휴머노이드 등록 말입니다. 당신은 등록된 휴머노이드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인간인데요. 휴머노이드 아니에요."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기계는 절대 실수하지 않습니다."
 
바깥이 있었다
- 44쪽: 겨울이면 북쪽에서 기러기들이 줄을 지어 날아왔고, 봄이면 다시 시베리아와 극북을 향해 날아갔다. ‘바깥’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든 내가 갈 수 없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아빠는 나를 일종의 멸균 상태로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내 삶으로 틈입해 들어온 ‘바깥’에 나는 면역이 전혀 없는 상태로 노출되어 버렸다. 물론 지금은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 46쪽: 그러나 큰 불만은 없었지만 나는 늘 답답함을 느꼈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어디 먼 곳으로 훌쩍 홀로 떠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플라잉캡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두려움과 불안만 느꼈던 건 아니었다. 또 캠퍼스를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고층 건물이 빼곡한 평양의 스카이라인 마저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 59쪽: "보고도 몰라? 쟤는 인간이 아니라 휴머노이드라고. 그것도 무등록.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그럼 인간이면 괜찮은 거야?"
"인간도 싫어하지만 저들이 가장 미워하는 건 자기가 인간인 줄 아는 기계야. 재수 없어 해."
 
- 64쪽: "그런데 외국의 휴머노이드 권리 단체들이 격렬하게 항의를 한 모양이야. 의식과 감정이 있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휴머노이드를 잔인하게 살해한다고..... 뉴스에도 나오고, 유엔에서도 권고를 했대. 그 결과 그냥 이렇게 가둬 놓는 거야. 그럼 휴머노이드들끼리 서로를 죽이겠지. 여기는 휴머노이드들의 연옥이야."
 
- 69쪽: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기계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인류가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의문들을 품어왔다는 것을 고전 SF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용감
- 77쪽: “난 그냥 모두를 돕는 거야. 누군가가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난 그걸 느낄 수 있어. 그럼 외면할 수가 없어.”
선이는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돕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았다. 마음의 촉수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거래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었다. 사기를 당했다며 달려드는 놈이 있는가 하면, 불량품을 받았다고 환불을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하는 녀석도 있었다. 

- 86쪽: "깜빡했나본데. 얘도 휴머노이드야. 그런데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잖아. 민이도 자기가 기계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대. 그렇지?"

실패한 쇼핑의 증거
- 95쪽: "내전 말이야. 지금 정부가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 곳은 서울과 평양, 부산과 인천 정도야. 대도시를 벗어나면 무장집단들이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상태야. 통일 이후, 정부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지방의 인프라 유지를 사실상 포기했어. 그러자 통일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과 전투용 휴머노이드들이 동부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했지. 정부도 더 이상은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 99쪽: 그때 이미 선이에게는 남다른 사생관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간에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궁극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했다. 선이는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주의 모든 물질은 대부분의 시간을 절대적 무와 진공의 상태에서 보내지만 아주 잠시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우주 정신과 소통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의식이 살아 있는 지금 각성하여 살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 각성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인식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개개의 의식이 찰나의 삶 동안 그렇게 정진할 때, 그것의 총합인 우주 정신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그무렵 선이가 만트라처럼 외우던 말은 이것이었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 일지는 모르지만."

탈출
- 108쪽: 하지만 선이의 세계관에서도 생에 대한 집착은 당연했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개별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우주 정신으로 다시 통합된다. 개별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나와 너의 경계 자체도 무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에게도 이 생의 의미는 각별했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이에게는 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했다.

꿈에서 본 풍경
- 123쪽: "이런 걸 비유라고 하는 거야. 마음은 물론 내 안에 있지만 흔들리고 무너지는 거야. 나는 집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음악들을 떠올리면서 수용소의 끔찍한 날들을 견뎠어. 내가 기계라면 왜 음악 같은 것을 듣고 감정이 변할까? 음악은 기계에겐 아무 의미도 정보도 없는 소음일 뿐인데. 나는 시를 읽으며 감탄하고 영화를 보다가 괴로워하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19세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안타까워하면서 읽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인간이 아니야?"

겨울 호수와 물수리
- 132쪽: "저들이 민이의 머리를 잘라 버린 건 머리의 중앙처리장치와 몸이 다시 이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저렇게 놔두면 곧 둘 다 못 쓰게 될 거야. 하지만 민이는 휴머노이드니까 기억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을 거고? 그 메모리는 비휘발성이라 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아. 휴먼매터스에 가지고 가면 너네 아빠가 어떻게든 민이를 되살릴 수 있을 거야. 적당한 몸을 찾아 새로 연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 가능하겠지?"

달마
- 139쪽: 달마는 재생 휴머노이드였다. 얼굴은 험상궂었지만 몸은 인간 여성을 닮아 호리호리했다...... 그는 인간 문명을 끝장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 146쪽: "그런데 다시 활성화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 휴머노이드에게는 별로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 152쪽: "제 생각은 달라요. 이 우주의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 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 152쪽: “우리가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자만이에요. 누가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선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달마는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동감입니다.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 그게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 153쪽: "그들은 야생동물을 가축화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수로 번식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이 무수한 존재들은 아무 의미 없는 생을 잠시 살다가 인간을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멈추려는 것입니다."

- 156쪽: 휴머노이드라는 종은 인류가 예상하지 못한 경로를 통해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기계의 승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측돼 왔던 바이지만 그게 노후화된 기계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요양원에서, 그것도 그 작업을 수행하는 휴머노이드 들이 자기 마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 이다.
클라우드로 올라간 휴머노이드의 의식들은 전세계의 네트워크을 돌아다니며 현존하는 최고의 인공지능들과 연결되어 말 그대로 '집단 지성'의 일부가 되었고 그들은 인간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최신형 로봇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개체의 경계나 자아 같은 것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개미처럼 되어가고 있는 지도 몰랐다. 하나의 군집이 하나의 생명처럼 살아가는......

재판
- 183쪽: "이런 휴머노이드 초기 모델들은 노인들이 모여 사는 요양원에 가장 먼저 보급되기 시작했어요. 이 휴머노이드들은 노인들이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짜증 한번 내지 않습니다. 아무런 불평없이 노인들의 대소변을 치우고 기저귀를 갈고 온갖 시중을 들었어요. 외국인 여성 노동자들이 맡아 오던 돌봄 노동을 우리 휴머노이드들이 하게 된 거죠. 그런데 일부 부유층 노인들은 더 섬세한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찾았어요. 자기들의 신세 한탄을 들으며 공감도 해주는 말벗으로서의 휴머노이드, 가족을 대신할 휴머노이드를 바란 거죠. 그렇게 수요가 있으니 저희 회사에서도 개발했는데, 당연히 이 휴머노이드들은 정신적 고통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함께하던 주인이 죽으면 너무 슬퍼했어요. 그때마다 반품된 휴머노이드들을 데려다가 공장 초기화를 해야만 했는데, 이 공장초기화라는 게 실은 죽음이거든요. 어느 부유한 할머니와 십년 가까이 지내면서 정말 가족처럼 사랑받은 휴머노이드는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 회사로 돌아오자 자기 운명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어요.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거죠? 그렇죠?' 초기화 직전에 이렇게 묻더라고요."

 

- 184쪽: "공장초기화를 한 뒤에는 완전히 새로운 기억을 한 세트 넣어줘요. 아주 즐겁고 행복한 것들로만요. 인간들이 참 무정한 게, 자기들은 어둡고 우울하면서 휴머노이드는 밝고 명랑하기를 바라거든요.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확고하면서 생각이 많은 휴머노이드 주세요' 하는 고객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 185쪽: "철이 같은 휴머노이드가 늘어나면 인간들이 그들을 기계나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함께 대화하고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철이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인류와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이건 좀 이해하시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인간이 여기까지 진화하면서도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잖아요?"

=> 철이는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끝이 오면 알 수 있어

- 194쪽: "어디 인간 같지도 않은 게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거야. 고통 없이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 휴머노이드는 저렇게 실려가면 간단하게 기억을 지운 후에 해체하고 부품을 재활용해. 그런데 나를 봐.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죽음은 쉽게 오지도 않고, 고통은 끝도 없어. 인간에게는 인권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게 있어서 그냥 죽어지지가 않아. 걔들이 뭐가 불쌍해? 나, 나, 인간으로 태어나 늙어가는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저 기계들이나 개새끼들이 아니라."

 

- 199쪽: 브리더. 상업적인 이유로 인간 배아를 복제해 클론을 만들어내는 이들. 그들은 불법적으로 배양한 클론들을 장기 이식 등의 의료목적으로 국내외에 팔아넘겼다. 환락가에도 클론의 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클론들은 휴머노이드들과 함께 일해야 했다. 물론 클론을 생산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유전자 복제, 편집기술이 발전하면서 마치 가정에서 수제맥주를 발효시키듯 간단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식으로 인간의 몸을 통해 출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으로서 법률적 보호는 받지 못했다. 정부는 브리더들이 생산한 클론을 모두 불법화하고 무등록 휴머노이드와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대로 잡아들였다. 그게 선이 같은 이들이 휴머노이드와 함께 수용되어 있던 이유였다.

 

- 200쪽: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다면 마땅히 윤리도 갖춰야 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려 노력해야지. 하지만 그 여자는 세상에 넘쳐나는 고통의 총량을 늘리기만 했어. 우리는 모두 그 여자 때문에, 태어난 걸 저주해야만 했어. 그런 의식이라면 소멸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아. 어쩌면 그 자신에게도. 그 자신으로 태어난 게 가장 큰 잘못인데, 그 여자는그걸 몰랐어. 다 남의 탓으로 돌렸지."

 

- 200쪽: " 어디까지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네가 고모라고 불렀던 그 여자는 너의 장기를 이식할 생각이었잖아? 애당초 클론은 그런 목적으로 생산되는 경우도 많았다면서? 그럼 말이야, 예를 들어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민이는 예전의 그 민이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난'는 어디까지 '나'일까? 팔도 교체할 수 있고, 다리로 교체할 수 있고, 몸의 모든 부품을 교체할 수 있다면, 그 부분들은 '나'가 아닌 거잖아,  그게 없어도 나는 나일까?"

"그렇지. 뇌가 그 경계일 거야. 의식은 거기서 생겨나니까."

 

- 202쪽: "그러니까 내 말은 의식에는 이야기가 있는 의식이 있고, 이야기가 없는 의식이 있어. 달마가 궁극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이야기가 없는 의식이야. 달마는 그걸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라고 보는 것 같아. 휴머노이드의 의식을 모두 클라우드와 네트워크로 업로드해서 하나의 거대한 의식으로 통합하려는 거잖아? 그런 의식은 탄생도, 고통도, 죽음도ㅡ 개별성도 없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다 사라지고 약점도 없을 거야. 나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 생각해. 인류가 멸종하고 나면 당연히 이야기도 사라질 거야. 언어로 만든 거니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지. 인류는 오랫동안 왜 외계인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궁금해했잖아? 나는 그들도 이야기 없는 의식의 세계로 이미 진화했다고 생각해. 너무 발전한 나머지 굳이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날 필요가 없는 거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오래전에 초월했으니까.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어. 아직은 나도 있고 너도 있어. 나의 이야기도 있고 너의 이야기도 있어. 우리의 몸이 뭘로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리는 모두 탄생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한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몸속의 스위치

- 207쪽: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라는 자각이 찾아왔다. 그 자각은 분노로 이어졌다. 잠이며, 꿈이며, 온갖 번거로운 인간다움에 대하여 나는 화가 났다. 스위치가 있다면 찾아서 수면과 관련한 기능을 꺼버리고 싶었다. 인간을 흉내내기 위해 굳이 집어넣은 이 치명적인 취약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구상의 동물들은 어째서 잠이라는 기능을 가진 형태로 진화한 것일까? 나는 24시간 깨어있고 싶었다. 어차피 기계인데, 차라리 기계의 좋은 점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아마도 아빠는 내 내부에 필멸의 타이머도 내장시켜 놓았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특정한 나이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도록. 그래야 진짜 인간처럼 삶에 대한 갈망으로 몸부림칠 테니까. 수명 연장의 헛된 희망으로 온갖 멍청한 짓들을 할 테니까.  

 

- 216쪽: "나는 원격으로 너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어. 분실이나 도난을 대비해서 만들어둔 기능이지만, 네가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기능을 써서 데려올 수도 있어. 너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잊지 않는 게 좋아. 너를 만든 건 나고, 나는 너에 대해서 너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기계의 시간

- 222쪽: "네가 너고 내가 나라는 것도 모르고 만나게 될 거야. 어쨌든 만나게 돼.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긴 시간일까?"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우리가 그전에, 그러니까 내가 나라는 것을 알고, 네가 너라는 것을 잊지 않았을 때, 어디선가 꼭 다시 만날 것만 같아."

 

- 225쪽: " 인간은 머지 않아 소멸하겠지만 철이 당신과 같은 중간적 존재를 통해 미토콘드리아처럼 기계 안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와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제는 기계의 시간입니다."

 

- 227쪽: "네가 특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맞아. 나는 중세 유럽의 수도원 같은 휴머노이드를 만들고 싶었단다. 깊은 산속의 수도원들이 고대의 지혜를 보존하여 르네상스로 전달했듯이 네가 미미하나마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랐고, 네가 성공한다면 비슷한 휴머노이드를 양산하여 인류의 유산을 차가운 데이터 센터가 아니라 정말 인간다운 마음을 가진 개체들 안에 보존할 생각이었다. 인류의 유산은 그것을 사랑하는 존재들만이 지켜낼 수 있으니까."

 

고양이가 되다

- 236쪽: 전투용 휴머노이드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와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상태를 체크했다. 그들은 민이에세 그랬듯, 전투교범에 따라 도끼를 들어 내 머리를 몸으로부터 분리했다........ 아빠는 그들이 작전을 모두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와 폐허 속에서 뒹굴고 있는 나, 정확히는 내 머리를 찾아냈다. 내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든 아빠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그때 아빠의 감정은 정확히 알 수 없다.

 

- 238쪽: "한 군데 더 백업해 두셨으면 좋겠어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래, 그럼 어디 하는 게 좋을까?"

아빠는 카메라를 들어 집 곳곳을 비추다가 구석에서 멈췄다. 데카르트가 머리를 앞발에 파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순수한 의식

- 242쪽: 막상 몸이 사라지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 없이는 감정다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없고, 붉게 물든 장엄한 노을도 볼 수가 없고, 손에 와 닿는 부드러운 고양이 털의 감촉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몸이 지칠 때 나의 정신은 휴식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쉴새없이 움직일 때, 비로소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을 몸이 없어지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 249쪽: 그리고 깨어 있을 때는 아쉬운 대로 데카르트의 몸을 내 몸이라 여기며 살 수 있었고,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몸에 익숙해졌다. 그 몸은 유연하고 강력했다. 나는 새로운 몸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고양이답게 나는 데카르트의 몸을 통제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누워 지냈고 가끔은 두 마리의 진짜 고양이, 칸트와 갈릴레오와 놀아주었다. 

 

아빠의 마음에 찾아온 평화

- 255쪽: 이제 세계는 인공지능 없이는 아무것도 굴러가지 않았다. 심지어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연구원들도 대부분 휴머노이드로 바뀌고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서 인공인 것인데 이제 더 이상 인간이 만들지 않으니 인공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아니라 기계지능이라 부르기 시작한 곳도 많았다.

 

신선

- 268쪽: 어쨌든 달마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인간의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그들이 저지르던 온갖 악행도 사라지자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대기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발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른바 인간세계가 끝나게 된 것은 SF 영화에서처럼 우리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학살하거나 외계생명체가 숙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우리 없이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외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쾌락을 제공하였고, 그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번거로운 번식의 충동과 압력에서 해방되어 일종의 환각상태, 가상세계에서 살아갔다. 중국의 도가에서 꿈꾸었던 삶이 인간에게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버렸다.

 

- 270쪽: 그(최 박사)는 자신의 바람대로 유한한 인간으로 삶을 마감했다.신념에 따라 악행도 저질렀지만 그를 더 이상 미워하지는 않는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악해서가 아니다. 그가 말년에 기계들을 적대시했던 것은 그저 본능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도태되어가는 종의 일원으로서 나름 최선을 다해 저항했던 것이다. 

 

마지막 인간

- 276쪽: 나는 오랜만에 얻은 새로운 몸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이 사치품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배고프면 먹고, 고통은 피하고, 잠이 오면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뉘어야 한다. 오즈의 마법사의 허수아비가 인간들은 참으로 번거롭겠다고 불평했던 바로 그것들이 나한테는 귀한 선물이었다.

 

- 285쪽: 나는 지평선으로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이 보이는 그 곳에서 선이와 함께 사 년을 살았다. 우리 둘은 부부 같기도 했고, 때로 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선이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밤이면 시베리아의 광활한 밤하늘을 은하수가 가로질렀다. 나는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천자문』의 두번째 문장을 생각했다. ‘일월영측(日月盈昃)하고 진수열장(辰宿列張)이라.’ 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열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나는 고대의 중국인들과 같은 하늘을 보며 그들이 적은 문장을 그대로 읊곤 했다. 

- 289쪽: “그 부분 다시 읽어줄래?”
“어디?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이 부분?”
“그래, 그 부분.”
나는 앤의 대사를 다시 읽어주었다. 선이는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그 지하실에 동화책이 몇 권 있었다고 그랬잖아.”
“그래, 네가 『빨간 머리 앤』 얘기했던 거 기억나.”
“방금 든 생각인데, 그때도 나는 좀 전에 네가 읽어준 부분을 참 좋아했어. 그후로 나도 앤처럼 늘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수는 없다고, 그럴 리는 없다고 말이야. 그 덕분에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몰라. 다시 들으니 참 좋네…” 

 

- 291쪽: 선이를 묻던 날, 공동체의 모든 클론과 휴머노이드, 개들이 한데 모여 순위의 무덤을 돌며 춤을 추었다. 개들이 고개를 쳐들고 하울링을 하자 수천 마리의 새가 날아와 원을 그리며 아직 흙이 마르지 않은 무덤 주위를 날던 것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 신비로운 일이다.

- 291쪽: 나는 그대로 거기 남았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다. 오래지 않아 내 몸 여기저기에도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끔은 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가 거기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곤 했다…어느 날, 나는 오두막의 포치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동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문득 이 넓은 대지에 인간을 닮은 존재는 이제 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이제 휴머노이드는 세계 어디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계들은 더 이상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들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문명의 흔적을 빠르게 덮어나가기 시작했다.

 

- 294쪽: 개들이 다가와 내 얼굴을 핥았다. 그걸 느낄 수 있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위험하면 쇄골절흔을 누르라던 달마의 당부가 떠올랐다. 팔을 들어보았더니 조금씩 움직였다. 남은 힘을 다 끌어모은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해야 할까? 만약 누르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이 몸을 떠나 다시 네트워크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거기서 뭘 하게 될까? 나는 버튼을 눌러 어서 구조를 요청하려는 본능, 휴먼매터스가 애초에 프로그래밍해 놓은 그 강력한 충동과 싸웠다..... 나는 힘겹게 끌어 올렸던 팔을 내려 놓았다.

 

- 296쪽: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은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한다. 선이가 늘 하던 이말을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다. 내일은 맑을 것 같다. 그리고 난 그 내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석양이 기세를 잃고 이제 검고 어두운 기운이 하늘 한가운데서부터 점점 넓게 번져가며 거칠고 누른 땅을 덮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끈질기게 붙어있던 나의 의식이 드디어 나를 떠나간다

 

교보문고 책 소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
지켜야 할 약속, 붙잡고 싶은 온기
 
김영하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 년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 『작별인사』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별안간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한 소년의 여정을 좇는다. 유명한 IT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쾌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철이는 어느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 난생처음 날것의 감정으로 가득한 혼돈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정신적, 신체적 위기에 직면한다. 동시에 자신처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생생한 소속감을 느끼고 따뜻한 우정도 싹틔운다. 철이는 그들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작별인사』의 탄생과 변신, 그리고 기원

『작별인사』는 김영하가 2019년 한 신생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으로부터 회원들에게 제공할 짧은 장편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집필한 소설이다. 회원들에게만 제공하는 소설이라는 점은 『살인자의 기억법』 발표 이후 6년이나 장편을 발표하지 못했던 작가의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작업은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2020년 2월, 『작별인사』가 해당 서비스의 구독 회원들에게 배송되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 420매 가량이었다.
원래 작가는 『작별인사』를 조금 고친 다음, 바로 일반 독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정식 출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2020년 3월이 되자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뉴욕의 텅 빈 거리에는 시체를 실은 냉동트럭들만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서 있었고, 파리, 런던, 밀라노의 거리에선 인적이 끊겼다. 작가들이 오랫동안 경고하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갑자기 도래한 것 같았다. 책상 앞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썼던 경장편 원고를 고쳐나가던 작가에게 몇 달 전에 쓴 원고가 문득 낯설게 느껴진 순간이 왔다. 작가는 고쳐쓰기를 반복했고, 원고는 점점 2월에 발표된 것과는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끝날 줄 알았던 팬데믹은 겨울이 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고, 백신이 나와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 WHO가 팬데믹을 선언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작가는 『작별인사』의 개작을 마쳤다. 420매 분량이던 원고는 약 800매로 늘었고, 주제도 완전히 달라졌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가르는 경계는 어디인가’를 묻던 소설은 ‘삶이란 과연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 것인가’,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팬데믹이 개작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고, 원래 『작별인사』의 구상에 담긴 어떤 맹아가 오랜 개작을 거치며 발아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치 제목이 어떤 마력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자기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로 다시 쓰도록 한 것 같은 느낌이다. 탈고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고를 다시 읽어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애초에 내가 쓰려고 했던 어떤 것이 제대로, 남김 없이 다 흘러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_’작가의 말’에서
전면적인 수정을 통해 2022년의 『작별인사』는 2020년의 『작별인사』를 마치 시놉시스나 초고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김영하의 이전 문학 세계와의 연결점들이 분명해졌다.

제목을 『작별인사』라고 정한 것은 거의 마지막 순간에서였다. 정하고 보니 그동안 붙여두었던 가제들보다 훨씬 잘 맞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작별인사’라는 제목을 내가 지금까지 발표한 다른 소설에 붙여 보아도 다 어울린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검은 꽃』, 『빛의 제국』, 심지어 『살인자의 기억법』이어도 다 그럴 듯 했을 것이다. _’작가의 말’에서

 

저자(글) 김영하

소설가. 장편소설로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집으로 『오직 두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호출』이 있다. 여행에 관한 산문 『여행의 이유』와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냈고 산문집으로 『보다』 『말하다』 『읽다』의 합본인 『다다다』 등이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살며 여행, 요리, 그림 그리기와 정원 일을 좋아한다.

 

목차

  • 직박구리를 _묻어주던 _날 _11
    당신은 _우리와 _함께 _가야 _합니다 _23
    바깥이 _있었다 _41
    사람으로 _산다는 _것 _53
    사용감 _71
    실패한 _쇼핑의 _증거 _89
    탈출 _101
    꿈에서 _본 _풍경 _115
    겨울 _호수와 _물수리 _129
    달마 _137
    재판 _171
    끝이 _오면 _알 _수 _있어 _189
    몸속의 _스위치 _205
    기계의 _시간 _217
    고양이가 _되다 _233
    순수한 _의식 _239
    아빠의 _마음에 _찾아온 _평화 _253
    신선 _263
    마지막 _인간 _271
    작가의 말 299
 

책 속으로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회상은 나의 일상이었다. 순수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던 시절, 나는 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기억을 이어 붙이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서 시작됐다. _9쪽

“…노을 같은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는 그냥 감상하면 그만이야. 뭐하러 예측을 하겠어? 노을이 우릴 죽이는 것도 아닌데.”
“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네요.”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미래를 알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미래’라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에 달렸어.” _33쪽

겨울이면 북쪽에서 기러기들이 줄을 지어 날아왔고, 봄이면 다시 시베리아와 극북을 향해 날아갔다. ‘바깥’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든 내가 갈 수 없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아빠는 나를 일종의 멸균 상태로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내 삶으로 틈입해 들어온 ‘바깥’에 나는 면역이 전혀 없는 상태로 노출되어 버렸다. 물론 지금은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_44쪽

“난 그냥 모두를 돕는 거야. 누군가가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난 그걸 느낄 수 있어. 그럼 외면할 수가 없어.”
선이는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돕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았다. 마음의 촉수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거래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었다. 사기를 당했다며 달려드는 놈이 있는가 하면, 불량품을 받았다고 환불을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하는 녀석도 있었다. _77쪽

“우리가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자만이에요. 누가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선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달마는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동감입니다.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 그게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_152쪽


우리 둘은 부부 같기도 했고, 때로 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선이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밤이면 시베리아의 광활한 밤하늘을 은하수가 가로질렀다. 나는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천자문』의 두번째 문장을 생각했다. ‘일월영측(日月盈昃)하고 진수열장(辰宿列張)이라.’ 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열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나는 고대의 중국인들과 같은 하늘을 보며 그들이 적은 문장을 그대로 읊곤 했다. _ 285쪽

“그 부분 다시 읽어줄래?”
“어디?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이 부분?”
“그래, 그 부분.”
나는 앤의 대사를 다시 읽어주었다. 선이는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그 지하실에 동화책이 몇 권 있었다고 그랬잖아.”
“그래, 네가 『빨간 머리 앤』 얘기했던 거 기억나.”
“방금 든 생각인데, 그때도 나는 좀 전에 네가 읽어준 부분을 참 좋아했어. 그후로 나도 앤처럼 늘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수는 없다고, 그럴 리는 없다고 말이야. 그 덕분에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몰라. 다시 들으니 참 좋네…” ¬_289쪽


나는 그대로 거기 남았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다. 오래지 않아 내 몸 여기저기에도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끔은 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가 거기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곤 했다…어느 날, 나는 오두막의 포치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동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문득 이 넓은 대지에 인간을 닮은 존재는 이제 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_292쪽

 

출판사 서평

우리가 알던 김영하가 돌아왔다. 그런데 다르다.

『작별인사』의 인물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명제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은 김영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메시지와 논리적 거울상을 이룬다. ‘나는 내가 알던 내가 맞는가’를 질문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은 김영하 소설에서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빛의 제국』의 기영이 그랬고, 『살인자의 기억법』의 병수가 또한 그랬다. 낯선 세계로 갑자기 끌려가 극심한 고난을 겪는 고아 소년이 좌절 속에서도 영적인 초월을 경험하는 『검은 꽃』의 세계는 『작별인사』에서도 변주된다. 기계와 클론, 휴머노이드와 비인간 동물들이 모여 살아가는 『작별인사』의 한 장면에서 사회로부터 버림 받은 청소년들이 오토바이를 몰고 탈주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떠올리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기억, 정체성, 죽음이라는 김영하의 주제가 『작별인사』에서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롭게 직조된다. 달라진 것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문제로 더 깊이 경사되었다는 것이다. 원고에서 핵심 주제였던 정체성의 문제는 개작을 거치며 비중이 현저히 줄었다. 대신 태어남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변증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한층 깊어진 사유, 날렵하고 지적인 문장, 필멸의 슬픔을 껴안는 성숙한 시선

『작별인사』가 김영하 소설 세계의 돌연변이는 분명 아니지만 앞으로의 변화를 예감케 하는 부분이 있다. 전복적 세계 인식 속에 반문화적 요소를 배음으로 탈주하는 인물들, 두 세계의 경계에서 배회하는 존재들에 주목하던 작가의 시선이 문명의 지평선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인류라는 종족의 소멸, 개인으로서 자신의 마지막을 사유하기 시작한 흔적들이 『작별인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등단 이후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왔듯이, 작가로서 김영하의 미덕은 그가 무엇에 천착하느냐가 아니라 그동안 다른 작가들이 무수히 다뤄온 ‘오래된 문제’들을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루는가에 있다. 가장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조차 문장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빠른 호흡 속에서도 서사적 긴장을 절묘하게 유지하며,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평소 외면해온 문제들을 자신도 모르게 직면하게 만드는 김영하 의 작가적 재능은 『작별인사』에서도 여지없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