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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2024.9.18)

클리오56 2024. 9. 18. 18:02

 

내용 및 소감

작가 김훈이 일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안중근의 거사를 중심으로 한 짧은 기간에 대한 소설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 및 제국주의와 안중근의 저항이 부딪치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카톨릭의 살인죄와 대의가 충돌한다. 이토를 처단할 당시 안중근은 '코레아 후라'를 외쳤는데, 주변의 러시아나 중국인들이 그의 대의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즉 대한제국 만세이다.

 

재판과정에서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고 밝혔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발언은 일본이 이 거사를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라 단순 살인으로 몰고가려는 의도와 반하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유언으로 이토를 죽인 하얼빈에 묻히기를 희망하고 독립되면 한국으로 이장해 달라고 하였지만, 한인사회의 동요를 두려워한 일본은 여순감옥 내 무덤에 당일 처리하였다. 빌렘 신부가 교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푸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30쪽: 안중근 도마, 부인 김아려 아그네스, 아들 분도 베네딕도. 신부 빌렘에게서 안중근은 19세에 세례 받음.
* 어머니 조마리아

33쪽: 안중근은 열여섯의 나이에 고을 사내들을 이끌고 나서서 마을로 접근하는 동학군을 격퇴했다. 안중근은 말하지 않았지만, 빌렘은 이 싸움의 유혈과 사상을 알고 있었다. 안중근은 동학군과 싸웠지만, 세상을 못 견뎌하는 성정은 그가 싸웠던 동학군과 별 차이 없을 것이었다.

34쪽: 1년 전에 안중근이 성당으로 찾아와서 상해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빌렘은 왜 가는지를 묻지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빌렘은 안중근이 세속의 길로 나아가려는 것을 알았다.
 
40쪽: (이토->순종) 쇠가 이 세상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길이 열리면 이 세계는 그 길 위로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

53쪽: 안중근은 진남포로 이사해 작은 학교를 열고 학생들에게 영어와 지리, 국사를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은 답답했으나 안중근은 거기에 마음을 붙이려고 애썼다. 학생들이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사태를 안중근은 놀랍게 여겼다.

73쪽: (동생 안정근) 형님 가지 마시오. 여기서 삽시다. (안중근) 여기는 이미 이토의 땅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길을 찾아가겠다. 이것은 벌레나 짐승이나 사람이 다 마찬가지다. 이것이 장자의 길이다.
 
88쪽: 도주막의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90쪽: 1908년에 연해주의 한인들이 300여 명의 병력으로 의병대를 결성했다.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계급을 받고 우영장의 직책으로 50여 명을 거느렸다. 여름에 한인 의병대는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북도 경흥의 산악 고지로 출병했다.

95쪽: 안중근이 물색 없이 포로를 살려주어서 기습 공격을 자초하게 된 것이라고 연추로 돌아온 대원들이 말을 퍼뜨렸다. 연추에서 안중근은 운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더불어 세력을 일으키기는 점점 어려웠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97쪽: 만월대에서 찍은 이토의 사진은 벼락처럼 안중근을 때렸다. 벼락이 시야를 열었다. 몸속의 먼 곳에서 흐린 구름처럼 밀려 다니던 것이 선명한 모습을 갖추고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 토의 몸이 안중근의 눈앞에 와 있었다.... 신문 속 이토의 사진을 보면서 안중근은 조준점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손짓을 느꼈다.
 
104쪽: 우덕순이 말했다.
-이토가 온다는 얘기냐?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온다고?
항구 앞 루스키섬의 등대 불빛이 어둠을 휘저었다. 불빛은 술집 안까지 들어왔다. 불빛이 스칠 때 우덕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112쪽: 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동행할 것인지를 대놓고 물어보지 않았고, 우덕순도 같이 가자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의 만주 방문을 알리는 신문을 보여주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운명을 느꼈다. 자신의 생애는 이 불가해한 운명의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우덕순은 생각했다. 그 예감은 이토를 쏘아야 한다는 뚜렷하고 밝은 목표로 귀결되고 있었다.

127쪽: 9년 뒤 내각 수뇌부들과 함께 러일 전쟁을 기획할 때 이토는 그 결과가 압도적이고 불가역적인 것이 되도록 설계했다. 개전의 가장 큰 명분은 '조선의 독립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정해서 세계에 공포하기로 했다.

142쪽: 둘은 사진관 의자에 앉았다. 사진사가 카메라 뒤에서 러시아 말로 뭐라고 소리치더니 셔터를 눌렀다. 새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몸 매무새와 이발을 한 이목구비가 사진에 찍혔다. 안중근은 사진 값으로 이 루블을 냈다. 러시아인 사진사가 손가락 5개를 펴 보이며 닷새 후에 와서 사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닷새 후에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154쪽:
(안) 여기서 헤어지자. 너는 채가구를 지켜라. 나는 하얼빈을 맡겠다.
(우) 좋은 생각이다. 내가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안) 채가구가 중요하다. 네가 채가구에서 쐈는데 못 죽이면 나도 기회가 없어진다.
 
159쪽: (김성백의 집에서)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166쪽: 안중근의 귀에는 더 이상 주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러시아인들 틈새로 이토가 보였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늘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탄창에 네 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

178쪽: 이토를 죽인 범인은 한국인 청년 안중근이고, 안중근은 12년 전에 황해도 산골 마을에서 빌렘 신부에게 영세 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은 며칠 안에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 황실은 불량한 신민 한 명이 잘못 태어나서 저지른 죄업을 일본 황실에 거듭 사죄했다. 뮈텔은 이 황급한 사죄에서 사건의 배우로 의심받지 않으려는 한국 황실의 두려움을 읽었다.

185쪽: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에 뮈텔은 상심했다. 백 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다시 세속 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했다. 뮈텔은 자신의 걱정을 신부와 신도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해도 더 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193쪽: 이토가 죽지 않고 병원으로 실려가서 살아났다면, 이토의 세상은 더욱 사나워지겠구나. 이토가 죽지 않았다면 이토를 쏜 이유에 대해서 이토에게 말할 자리가 있을까. 세 발은 정확히 들어갔는데, 이토는 죽었는가. 살아나는 중인가. 죽어가는 중인가.

194쪽: .....이토의 나라는 대련을 쳐부 수어서 차지했고, 대련을 발판으로 하얼빈으로 진출했다. 하얼빈역 플랫폼은 내가 이토를 쏘기에 알맞은 자리고, 이토가 죽기에 알맞은 자리다. ....나는 이토가 온 철도를 거슬러 가고 있다. 대련은 이토의 세상이다. 대련은 내가 말하기에 편안한 자리이고 내가 죽기에도 알맞은 자리이다.


217쪽: 안중근은 '코레아'라는 이름을 내걸고 이토를 쏘았고 세계 공통어 '후라'로 만세를 외쳤다.

220쪽: (미조부치 검찰관) 그대가 쏜 총알 세 발이 이토 공에게 명중했다. 이토 공은 십오분 만에 서거했다.
.... 안중근은 미조부치에게 물었다. 이토는 총 쏜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죽었는가?

227쪽: 안중근은 용수를 벗은 눈으로 우덕순을 바라보았다. 우덕순도 안중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안중근은 우덕순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메마른 눈동자가 버스럭거리는 듯싶었다.

232쪽: (재판장 마나베)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대는 의병과 관련이 있는가?
(우덕순)나는 다만 일개의 국민으로서 했다. 의병이기 때문에 하고, 의병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234쪽: (재판장 마나베)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안중근)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나는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 이제부터 그 사유를 말하고자 한다. (재판 중단)

236쪽: 나의 목적은 동양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어므로 죽였다. 검찰관은 내가 이토를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해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238쪽: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청인 퇴정)

239쪽: 미조부치의 어조는 법전을 읽듯이 건조했고 반듯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정치범이 아니고 사전 공모에 따라 범행한 살인범이라고 미조부치는 결론지었다. 미조부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우덕순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248쪽: 빌렘은 겟세마네의 예수 앞에 꿇어앉았다. 빌렘은 조선에 부임한 이래 이 작은 반도 안에서 벌어진 죽음과 죽임을 생각했다. 교회 밖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지를 빌렘은 하느님께 물었다. 하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였으므로 이토의 사람들은 또 안중근을 죽일 테지만, 안중근이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아직은 며칠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빌렘은 안중근의 생명이 살아 있는 그 며칠을 생각했다.
 
251쪽: 안중근은 자신에게 영세를 베푼 사제를 향해서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는 황잡한 말을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이토를 죽였는데, 황사영은 서양 군함을 몰고 와서 국가를 징벌해 달라고 북경의 주교에게 빌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양극단에서 마주서서, 각자의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

253쪽: 사형 선고를 받고 사흘 후에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면서 안중근은 항소는 쓸데없는 짓이 될 것임을 알았다. 이 세상의 배운 자들이 구사하는 지배적 언어는 헛되고 또 헛되었지만 말쑥한 논리를 갖추어서 세상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264쪽: 출장 불가를 알리는 뮈텔의 답장을 받은 다음날 빌렘은 여수 누구 떠났다. 여순으로 가는 기선은 닷새에 한 번씩 진남포에서 출항했다. 운항 날짜가 맞았다. 진남포 부두에서 빌렘은 명동 대성당의 뮈텔에게 전보를 쳤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는 여순으로 갑니다.

265쪽: (안중근=>막냇동생 안공근) 오늘 네가 잘 왔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하얼빈에 묻어라. 하얼빈은 내가 이토를 죽인 자리이므로 거기는 우선 내가 묻힐 자리이다. 한국이 독립된 후에 내 뼈를 한국으로 옮겨라. 그전까지 나는 하얼빈에 묻혀 있겠다.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내 뜻에 따라다오.

271쪽: 관동도독부는 안중근의 시체를 유족에게 내주지 말고 집행 후 지체없이 감옥 구내 묘지에 묻으라고 여순감옥에 공문으로 지시했다.

273쪽: 안중근이 몸을 앞으로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빌렘이 몸을 앞으로 굽히고 들었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사형수의 머리와 사제의 머리가 가까워졌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옥리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기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빌렘은 침묵 속에서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276쪽: (안응칠 역사를) 탈고한 지 열하루 뒤에 안중근은 집행되었다.

마지막 할말이 더 있는가라는 구리하라 전옥이 물었고, 이에 안중근은 '없다. 다만 동양평화만세를 세번 부르게 해다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책 소개

『칼의 노래』를 넘어서는 깊이와 감동
김훈이 반드시 써내야만 했던 일생의 과업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작가들의 작가’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이 출간되었다. 『하얼빈』은 김훈이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인생 과업으로 삼아왔던 특별한 작품이다. 작가는 청년 시절부터 안중근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를 소설로 쓰려는 구상을 품고 있었고, 안중근의 움직임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글로 감당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인간 안중근’을 깊이 이해해나갔다. 그리고 2022년 여름, 치열하고 절박한 집필 끝에 드디어 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하얼빈』에서는 단순하게 요약되기 쉬운 실존 인물의 삶을 역사적 기록보다도 철저한 상상으로 탄탄하게 재구성하는 김훈의 글쓰기 방식이 빛을 발한다. 이러한 서사는 자연스럽게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데, 『칼의 노래』가 명장으로서 이룩한 업적에 가려졌던 이순신의 요동하는 내면을 묘사했다면 『하얼빈』은 안중근에게 드리워져 있던 영웅의 그늘을 걷어내고 그의 가장 뜨겁고 혼란스러웠을 시간을 현재에 되살려놓는다.

난세를 헤쳐가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 미약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김훈의 시선은 『하얼빈』에서 더욱 깊이 있고 오묘한 장면들을 직조해낸다. 소설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의 물결과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청년기의 순수한 열정이 부딪치고, 살인이라는 중죄에 임하는 한 인간의 대의와 윤리가 부딪치며, 안중근이 천주교인으로서 지닌 신앙심과 속세의 인간으로서 지닌 증오심이 부딪친다. 이토록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지는 복합적인 갈등을 날렵하게 다뤄내며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야의 차원을 높이는 이 작품은 김훈의 새로운 대표작으로 소개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목차

  • 하얼빈 _007

    후기·주석 _281

    작가의 말│포수, 무직, 담배팔이 _301

책 속으로

쇠가 이 세상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길이 열리면 이 세계는 그 길 위로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40쪽)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88~89쪽)

우덕순이 말했다.
-이토가 온다는 얘기냐?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온다고?
항구 앞 루스키섬의 등대 불빛이 어둠을 휘저었다. 불빛은 술집 안까지 들어왔다. 불빛이 스칠 때 우덕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104쪽)

둘은 사진관 의자에 앉았다. 사진사가 카메라 뒤에서 러시아 말로 뭐라고 소리치더니 셔터를 눌렀다. 새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몸 매무새와 이발을 한 이목구비가 사진에 찍혔다. 안중근은 사진값으로 이 루블을 냈다. 러시아인 사진사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닷새 후에 와서 사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닷새 후에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142쪽)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159쪽)

탄창에 네 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166~167쪽)

이토가 죽지 않고 병원으로 실려가서 살아났다면, 이토의 세상은 더욱 사나워지겠구나. 이토가 죽지 않았다면 이토를 쏜 이유에 대해서 이토에게 말할 자리가 있을까. 세 발은 정확히 들어갔는데, 이토는 죽었는가. 살아나는 중인가. 죽어가는 중인가.(193쪽)

안중근은 용수를 벗은 눈으로 우덕순을 바라보았다. 우덕순도 안중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안중근은 우덕순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메마른 눈동자가 버스럭거리는 듯싶었다.(227쪽)

빌렘은 겟세마네의 예수 앞에 꿇어앉았다. 빌렘은 조선에 부임한 이래 이 작은 반도 안에서 벌어진 죽음과 죽임을 생각했다. 교회 밖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지를 빌렘은 하느님께 물었다. 하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였으므로 이토의 사람들은 또 안중근을 죽일 테지만, 안중근이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아직은 며칠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빌렘은 안중근의 생명이 살아 있는 그 며칠을 생각했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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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폭력과 야만으로 가득찬 시대,
청년들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를 그린 김훈식 하드보일드

안중근을 다룬 기존의 도서들이 위인의 일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는 데 주력한 것과 달리, 김훈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에 초점을 맞추어 안중근과 이토가 각각 하얼빈으로 향하는 행로를 따라간다. 이로써 『하얼빈』에는 안중근의 삶에서 가장 강렬했을 며칠간의 일들이 극적 긴장감을 지닌 채 선명하게 재구성된다.
구한말, 쇠약해져가는 조국을 바라보기만 할 수 없었던 청년들의 결기가 들끓고, 세상의 흐름에 맨몸으로 부딪친 민중들이 공허하게 스러지던 어두운 시대상도 김훈 특유의 단문으로 하드보일드하게 형상화된다.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안중근이 좇는 대의와 그가 느끼는 인간적인 두려움은 더욱 효과적으로 대비를 이룬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자신과 타인의 희생을 불사하면서도, 집안의 장남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며 천주교에서 세례 받은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수시로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은 그간 상대적으로 주목되지 않았던 낯선 면모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먼 곳에서 빌렘이 기도를 드리고 있고, 그 반대쪽 먼 끝에서 이토가 흰 수염을 쓰다듬고 있고, 그 사이의 끝없는 벌판에 시체들이 가득 쌓여 있는 환영이 재 위에 떠올랐다. 시체들이 징검다리처럼 그 양극단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신부님은 여기에 계시렵니까?
라는 말을 안중근은 참았다.(66~67쪽)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기로 결단하는 순간은 우연과 운명이 뒤섞여 빚어지는 전율로 가득하다. 암울한 미래에 고뇌하며 간도와 연해주 일대를 떠돌던 안중근의 하숙집으로 신문지 한 조각이 흘러드는데, 그 위에는 통감 공작 이토가 대한제국의 위상을 격하하고 일제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교묘히 연출한 순종 황제의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에 암시된 일제의 야욕을 감지한 안중근은 즉시 마음을 정하고 이토가 방문할 하얼빈을 향한 생애 마지막 여정에 오른다.
안중근은 곧바로 의병 활동을 함께했던 동지 우덕순을 찾아가고, 안중근을 맞은 우덕순 역시 안중근의 의중을 간파하고 두말없이 동행을 결정한다. 동일한 목적을 공유한 두 청년의 망설임 없는 의기투합이 간결한 대화를 통해 전달되며 묵직한 인상을 남긴다.

-꿩을 쏘고 남은 총알로 이토를 쏘는구나.
우덕순이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은 엷게 얼굴에 번졌다.
-우습지만 그렇게 되었다. 겨누어 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총을 많이 쏘아보았는가?
-많이 쏘지는 않았다. 나는 사냥꾼이 아니지만 이토는 꿩보다 덩치가 크니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안중근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나는 이토의 덩치가 너무 작아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다.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웃음은 흐렸고 소리 끝이 어둠에 스몄다.(115쪽)

일본인 검찰관과 법관들이 거사를 단행한 안중근 일행을 조사하며 남긴 신문조서와 공판 기록 또한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소설의 현장감을 높인다. 극도로 정제된 공문서의 이면에서 인간사의 비극을 읽어내는 것은 김훈의 특기 중 하나이다. 일면 건조해 보이던 이 문서들은 소설의 맥락 속에 절묘하게 배치됨으로써 당시의 뜨거웠던 현장을 증거하는 절절한 기록으로 다시 읽힌다.

-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이토 공은 고관高官으로 수행원과 경호원이 많은데, 그대는 암살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사람의 결심 하나로 되는 일이다. 결심이 확고하면 아무리 경호가 많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232쪽)

이러한 공술들은 소설적 각색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긴장되어 있고, 안중근과 우덕순의 답변은 단순하고 정확해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김훈은 이 기록들에서 유불리를 떠나 오직 스스로의 신념을 밝히기 위해 거침없이 발화되는 청춘의 언어를 읽는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짧은 생애를 바친 청년들의 모습이 동경심과 슬픔, 안타까움 등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신념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한 이들이 뿜어내는 순수한 빛

소설에서 안중근과 이토의 갈등만큼이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와 한국 교회를 통솔하는 뮈텔 주교의 갈등이다. 일본 형법에 근거한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신에게 죄를 고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빌렘은 그런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어주려 하고, 뮈텔은 한국에 겨우 자리잡은 천주교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빌렘의 뜻에 반대한다. 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빌렘과, 교회의 안위를 위해 역설적으로 세속과 결탁한 뮈텔의 대치는 성聖과 속俗의 대립이라는 갈등을 더하며 소설의 결을 더욱 풍부하게 일구어낸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빌렘은 뮈텔의 권위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안중근을 만나러 감옥으로 간다. 이러한 빌렘의 용기는 안중근의 거칠었던 영혼을 평온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명장면을 탄생시킨다.

안중근이 몸을 앞으로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빌렘이 몸을 앞으로 굽히고 들었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사형수의 머리와 사제의 머리가 가까워졌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옥리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기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빌렘은 침묵 속에서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다.(273~274쪽)

김훈이 그리는 안중근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온몸으로 길을 내며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안중근이 지녔던 젊음의 패기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환상은 그의 생명과 함께 부서져간다. 안중근이 부딪혔던 벽은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한 듯하다. 청년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길을 찾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고, 때로는 시류와 타협하여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을 버릴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기에 거대한 세상에 홀로 맞선 안중근의 생애는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과 탄식을 자아낸다.


책의 말미에 실린 ‘후기’에는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된 후 남겨진 이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와 배반의 이합집산이 펼쳐진다. 안중근의 외로운 고투가 일으킨 변화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져간 비극을 담담하게 서술한 이 후일담 형식의 글은 소설 바깥의 현실과 맞닿으며 또다른 울림을 준다. 『하얼빈』은 동양 평화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안중근을 비롯한 인물들이 선택한 길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려 한 책 속 많은 이들의 모습은 각자가 만들어낸 명장면 속에서 순수하게 빛나고 있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 ‘무직’이며 ‘포수’인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안중근은 말하고 또 말한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 _‘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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