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 3국 여행 4일차: 바쿠->트빌리시->아르메니아 예레반 입국 (2025.5.19)
아침산책 | 바쿠 지하철 체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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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아침산책은 카스피해 일출을 보기위함이다. 어제는 구름으로 실패했으니, 다시 시도~
아침 거리는 핫플한 곳임에도 모두 한산하다.
큰 행운이다. 도착은 비록 약간 늦었지만 해는 건물 위로 봉긋하다.
일출을 봤으니 느긋하게 데니스 몰 방향으로 걸었다.
문득 뒤돌아보니 해는 크레센트 호텔에 걸려있다.
바쿠 최고의 명소 플레임 타워
데니스 몰
국립카펫박물관, 바쿠에는 이러한 독특한 건물들이 다수있다.
미니 베니스, 이곳 역시 플레임 타워를 조망하는 명소이다. 이제는 굿바이~
메이든 타워
멋지게 페인팅한 차량 두대가 마켓팅으로 활용되는 듯하다.
되네르 케밥을 파는 푸드 트럭
첫날 맨처음으로 찍었던 동상, 맥도날드 앞에서 통화중.
숙소 입구, 겉은 번지르한데 뒷모습은 어악~~. 하지만 숙소 내부는 괜찮다. 캐리어 오르내림은 고역이다.
지하철 경험해보자는 연락이 왔기에, 누룽지 아침식사후 합류했다.
숙소 인근의 사힐역에서 탑승하여 한 정류장만 가기로.
바쿠의 지하철 역사는 꽤 오래된다. 1967년 개통되어 4개 노선이 운영중이다.
거리에 상관없이 0.5마낫이니 한번 탑승에 500원이 안된다.
우선 탑승카드는 카드 하나로 여러 명이 사용 가능하므로 하나만 구입하는데 2마낫, 3명이니 2마낫 충전으로 충분.
에스컬레이터의 깊이가 아득할 정도로 깊다.
사힐에서 1개역만 시험하였다.
젊은이들이 자리를 양보해준다. 한 구역이라 사양했지만 지극하다. 경로석 지정이 없어도 이런 선한 마음이 발휘된다.
종점 Icherisheher역에서 내렸다. 내릴 때는 카드 타치가 필요없다. 거리 상관없이 동일 가격이기 때문이다.
구시가를 오갈때 수차례 보았던 터라 이곳부터 숙소는 익숙하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일까?
어제 하루종일 함께했던 기사가 오늘 공항까지 센딩을 담당한다. 한번의 인연이 죽 이어진다.
아제르바이잔의 돈을 모두 소진해야 한다. 점심 뿐만아니라 저녁 빵까지 구입했다. 차이도 한잔 마시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여전히 앙숙이라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거쳐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으로 입국한다.
트빌리시에서 플라이원이라는 저가항공을 이용하는데,
체크인 카운터에서 우선 온라인 신청하지 않았다며, 별도 카운트에서 우선 하도록 요청한다.
그런데 갔더니 비용이 무려 1인당 36유로이다.
자기들 웹사이트에서 온라인 신청하면 무료이지만, 이곳에서는 대행하며 그런 바가지를 씌운다.
그리고 지금은 웹사이트 신청이 이미 늦었다고 한다.
코너 부근에는 그렇게 뜯어먹는 저가 항공사들이 쫙 깔려있다. 흉악한 상술에 조지아 이미지는 이미 나락이다.
탑승하여 비좁은 캐빈을 정리하여 배낭을 집어넣어려는데 보기만 할 뿐 꼼짝도 않고 서있다.
큰소리로 불렀다. 그제사 꼼지락거린다.
이놈의 저가항공은 운항중 물도 한컵 안준다.
예레반 도착하니 아라라트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주 맑은 날씨는 아니지만 길조라 여기고 조지아의 악몽을 떨쳐버렸다.
시내로 진입하는데 바쿠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낡고 쇄락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내일 새롭게 시작하자.
아르메니아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여러 자료를 답습하여 정리해보았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전쟁을 겪는 이웃인지라 국경을 직접 넘을 수 없는 상태이다.
하여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경유하여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으로 입국하였다.
한국인은 아르메니아에 180일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아르메니아에는 주한 공관이 없어 영사업무 등은 모스크바의 주러시아 대사관으로 연락해야한다.
아르메니아 역시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하였고 영토 문제로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겪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최근의 전쟁에서 패하여 문제의 영토를 사실상 모두 잃었다.
아르메니아(자국어로는 하야스탄)는 고원 내륙국이며, 수도는 예레반, 공용어는 아르메니아어이다.
남캅카스의 산국(a hill country)으로, 강수량이 적고 기후는 건조하다. 산업의 기초는 세반호(해발 1,900m)의 물에 의한
수력전기로서, 화학·야금공업(인조고무, 질소, 과린산 비료, 플라스틱, 도료, 동, 알루미늄)이 발달해 있다.

아르메니아의 국장에는 방패 가운데 아라라트산과 그 위에 안착한 노아의 방주가 그려져 있다.
아라라트산은 현재 튀르키예령이지만,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의 영산이기 때문에 사용되었다.
원래 아르메니아는 기원전 13세기 무렵, 활동했던 우라르투의 후손이다.
한 때 중동을 통일했던 아시리아와 맞설 정도로 강대국이었으나, 기원전 9세기에 메디아 왕국에 멸망당했다.
메디아 치하에서 저항하던 우라르투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 다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 지배당한다.
그로부터 우라르투 대신 아르메니아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대아르메니아 왕국을 형성하였다.
중세에는 지금의 터키 남동부를 중심으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이슬람 세력의 영향권에 들었다가, 근대 들어 러시아 제국령과 오스만 제국령으로 분할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말기(1915년 ~ 1923년)에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이 살해되었다.
이후 이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빠져나가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가 본격화되었다.
아르메니아는 영어식 표현이고 자기들은 하야스탄(Hayastan)이라고 부르는데, 즉 하이크 민족이라고 부른다.
국기의 노란색이 밀을 뜻하는데, 그만큼 빵이 맛있다.
또한 산이 90%나 차지하는 산악 나라이다보니 해발도 평균 1,800미터나 된다.
그러다보니 돌도 많고 세계 최고의 주상절리도 볼 수 있으며 돌로 만든 성당들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특히 아라라트 산은 성경의 노아의 방주와도 엮어지는 영산이다. 이 영산을 맑은 하늘에 볼 수 있다면 퍼펙트 여행이 된다.
아르메니아는 슬픈 나라이다. 이웃 아제르바이잔과는 최근까지 전쟁을 치렀고, 주변이 온통 이슬람 국가이다.
아제르바이잔, 이란, 튀르키예와 국경이고 북쪽으로 조지아이다.
정교회 국가인 조지아와 친할 듯한데, 그도 딱히 그런 것은 아닌듯하다.
송유관과 철도라인을 두고 조지아와 경쟁이었고 이 모두 조지아를 통과한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와 관계가 좋지 않으니 조지아를 경유하는게다.
송유관과 철도 통과로 조지아는 연 2조 정도 이득을 본단다.
정수일의 책 '실크로드 사전'에 따르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그리고 카스피해에 유입되는 아라쿠스와 쿠르 강들은 아르메니아의 산에서 발원한다.
여행서적 '트래블 북스 조지아+아르메니아',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연구소 유튜브,
그리고 아르메니아 대사가 저술한 '이토록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등을 참조로 아르메니아의 특징을 정리하였다.
1.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첫 국가이다.
301년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국교로 채택한 첫번째 국가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주요 이유중 하나이다.
* 이토록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아르메니아에서 포교활동을 계속한
12사도의 한 사람인 타다이와 그를 이은 발트로마이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의 사도교회'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은 크게 4개의 거주구로 나뉘는데,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또 하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이다.
이만큼 특별한 존재로서 단독으로 거주구를 가지고 있다.
2.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로 15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차세계대전 당시 1915년 오스만 제국(현 튀르키예)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로 15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튀르키예는 이 사실을 정치적인 이유로 부인하고 있지만
러시아를 포함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28개국은 대량학살로 인정하고 있다.
* 위키백과: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 또는 튀르키예 정부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거주했던 소수 민족이자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튀르키예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가 시행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학살 사건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대다수이나,
튀르키예 정부에서는 이를 강제이주에 따른 희생이라고 주장하면서 집단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1915년 대학살: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튀르키예가 일으킨 민족말살정책.
국토 1/4로 축소되고 800만명 디아스포라 발생 (러시아 200만, 미국 80만, 조지아 40만, 프랑스 25만 등)
* 1차: 1894~1896년, 오스만 제국 전체에서 약 30만명 집단 학살
* 2차: 1차대전, 150만명 학살 (제노사이드). 1915년 4월24일을 기념일로 지정
3. 아르메니아 인구는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다.
1915년 대량학살 사건 이후 수백만명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미국, 러시아 등에서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 인구는 현 아르메니아 인구 300만명 보다 많은 약 6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4. 아르메니아 국가 상징은 튀르키예에 있다.
아르메니아의 중요한 국가 상징이며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 바로 성경에도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안착했다고 전해지는 아라라트 산이다. 옛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튀르키예에 속해 있다.
두 개의 봉우리에 대해 시스와 마시스라고도 부른다.
* 구글 리뷰: 아라라트산은 해발 5137m, 소아라랏산은 해발 3925로 등산객들이 선호하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입니다.

5. 아르메니아의 빵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라바시는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얇은 모양의 전통 빵이다.
아르메니아의 문화표현인 라바시 빵 만들기는 201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 라바시에 고수, 치즈, 올리브 등을 싸서 먹는다. 치킨 바베큐도 맛있다.
6. 코카서스에서 가장 큰 호수를 갖고 있다.
아르메니아 영토의 5%에 해당하는 세반 호수는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이며,
Sevanavank 수도원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르메니아인들이 튀르키예에 거주할 당시 반 호수가 있었고,
지금 위치로 이동 한 후에 보니 반 호수를 닮았지만 검은 물(세가 검다는 뜻)이라 세반이라 불렀다.
7. 체스는 학교 수업 중 하나이다.
아르메니아는 체스 강국으로 잘 알려져있다. 실제로 유럽선수권 대회(1999년), 세계선수권대회(2011년), 체스 올림피아드(2006년, 2008년, 2012년)에 남자팀이 우승했다. 여자팀도 2003년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 경력을 갖고 있다.
8. 프랑스가 인정한 코냑이 유명
2차 대전이 막바지이던 1945년, 흑해 연안에 있는 옛 소련의 유명한 휴양지 얄타에 연합국 정상들이 모였을 때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아르메니아 코냑을 맛보고 반하자
당시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매일 마시라”며 365병을 선물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아르메니아가 브랜디 부문 그랑프리를 획득하였고,
그 맛이 워낙 뛰어나 프랑스 코냑협회에서 특별히 코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통상 식후주로 즐긴다.
9.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분쟁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지배권으로 수백년간 이어지는 분쟁이다.
약 100년전 그 지역은 구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 영토이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어 일종의 중립지대로 만들어 아르메니아가 관리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최근 아르메니아가 전쟁에 지면서 지금은 아제르바이잔이 지배권을 행사한다.
10. 와인
아르메니아는 오래전부터 많은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이다.
이것을 증명하듯 2007년에 아레니 지방에 있는 동굴에서 약 6100년 전의 와인 양조장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아레니 유적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 등록되어져 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현재 100 종류 이상의 포도가 재배돼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조라 카라시(Zorah Karasi) 레드와인은 우아하고 신선하며 병에 내성이 강한 것이 특징인데,
아르메니아 포도의 왕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품종 중 하나인 아레니 품종이다.
11. 아르메니안의 외모는 유럽 + 중동의 혼혈 느낌, 상술이 발달.
영국이 제국 시절 미얀마 등에서 영국 관리를 뒤따라다니며 관리자적 역할을 많이 했다.
그리고 유대인에 버금가는 상술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다.
* 무역과 거래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기에 칸트가 아르메니아인을 상업적 정신을 알고
사람들에게 평화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흄이라는 사람은 유럽에 유대인, 중동에 아르메니아인이 있으며, 유대인이 사기꾼이라면
아르메니아인은 정당한 거래인이라고 호평하였다. 아무튼 상업적 마인드가 탁월하다.
지리적으로 페르시아, 중동, 유럽으로 연결되는 가운데 위치하여 그런 성향이 형성되었을게다.
영국이 인도를 침략했을 때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미 체류하고 있었고, 영국은 1688년 이들과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들을 활용하여 미얀마, 중국에도 진출하였지만, 나중 이들의 기술을 다 빨아먹은 후에는 쫓아내고 탄압했다.
그러면 저항없이 또 물러났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가족 단위로 진출하였고, 성실하여 현지인들과 잘 융화되었다.
12. 뛰어난 재주로 발명품들이 많다.
칼라 TV, MRI, 레미콘, ATM, 자동차 자동변속기 등등을 발명하였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출처: 트래블 북스)
1. 코차리, 전통 군무 (2017년)
코차리는 축일이나 축제, 가족예식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행사에서 실행되는 일종의 전통집단 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춤은 전통적인 관악기와 타악기 반주에 맞추어 사람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일직선 또는 곡선을 그리며 일제히 움직이고, 발을 구르고, 무릎과 팔을 동시에 접었다 펴기도 하면서 추는 춤이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코차리를 사회의 공통,정체성과 연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렇듯 코차리는 역사와 문화 및 민족적 공동 기억을 지속해서 전승하게 해준다, 코차리는 전통무용으로서 드물게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전승됨이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유산이라고 한다.
2. 아르메니아 석비인 하치카르의 십자가석 예술, 상징, 공예기술(2010년): 하치카르는 아르메니아와 전 세계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의 장인들이 돌을 깎아 만든 석비이다. 십자라는 하츠와 돌이라는 카르가 합쳐진 말이다. 그리고 속세와 신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성유물 및 기념석으로서 신을 숭배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하치카르는 보통 응회암중에서도 질이 가장 좋은 것을 사용하며, 끌, 날카로운 펜과 망치를 사용하여 새긴다. 그런 다음 고운 모래를 사용하여 새계진 것을 문질러 다듬는다. 그다음 작은 모서리와 거친 표면을 진흙이나 회반죽으로 제거한 뒤 색을 칠한다. 완성되면 소규모 종교의식을 진행하면서 하치카르를 세운다. 축성이 이루어지고 승유를 바르고 나면 하츠카르는 신성한 힘을 지니게 되는데 이로써 하치카르는 도움, 보호, 승리, 장수, 추모, 영원을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
3. 아르메니아의 서사시 사순치 다비트의 구송 연행
아르메니아의 서사시 사순치 다비트는 신의 은총을 받으며 악으로부터 자기 고향을 지켜낸 도전적이고 독립심이 강한 소년 다비트에 관한 영웅 서사시이다. 이 서사시는 네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한 민족의 염원과 뿌리깊은 정서을 극화하여 표현한 전통적인 영웅 설화에 해당한다. 리드미컬한 운율을 지닌 서정적인 소리로 구송되며, 각각의 칸토는 리듬감 있는 시적 양식으로 노래한다. 흔히 아르메니아의 중요한 전통문화 중 하나로 알려졌으며,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종교, 신화, 철학, 우주론, 풍수, 도덕에 관한 전분야의 지식의 보고이자 백과사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 기차역 앞 분수대에 있는 동상이 사순치 다비트 이다.
4. 두둑과 그 음악 (2008년)
두둑은 오보에와 같은 관악기의 일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더블 리드 관악기로 알려져 있다. 음색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여린 비염을 낸다. 두둑 음악의 역사는 아르메니아의 티그란 대왕(95~55BC)시대부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두둑 음악은 여러 지방의 전통 노래 및 춤과 함께 어우러져 주로 결혼식과 장례식 등의 행사에서 연출된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두둑이야말로 아르메니아인들의 온화함, 기쁨 그리고 역사를 가장 잘 표현한 악기라고 여기고 있다. 애잔하고 구슬픈 중저음으로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두둑의 연주는 중동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많이 등장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OST를 연주한 악기가 바로 두둑이다.
- 아라 게보르기얀(Ara Gevorgyan)이 작곡한 아르차흐(Artsakh) 음악: 아르메니아 드럼과 피리 두둑을 사용,
https://youtu.be/eVQjsuxCi38?si=ZbQeUZsGyZ2T7c4c
** 세계테마기행
나이든 상인이 직접 연주까지 들려준 전통 악기 두둑(Duduk)은 우리나라의 피리와 닮았다. 아르메니아 전통 악기인 두둑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아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작업장을 떠나지 않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두둑 이야기. 고령임에도 약수터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아직은 청춘인 할아버지를 따라 동네 구경에 나선다. 가는 내내 끊이지 않는 인사와 악수 세례. 알고보니 할아버지는 동네의 인기스타. 덕분에 10분 거리에 있는 약수터에 다녀오는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 아직도 기운이 넘치시는지 할아버지는 직접 샤슬릭(Shashlik) 요리에 나선다. 꽃과 노래와 요리를 좋아하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할아버지와의 저녁 식사가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


5. 아르메니아 문자 예술과 문화적 표현 (2019년)
이는 수세기의 역사를 지닌 아르메니아 문자예술과 아르메니아 서체, 풍요로운, 문자 장식의 문화 그리고 문자의 다양한 이용에 관한 유산이다. 이 유산은 405년 메스로프 마슈토츠가 '1문자 1음운'의 원칙에 따라 창제한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기초로 한다. 마슈토츠가 창제한 36개 문자에다가 후대에 3개 문자가 추가되었고, 이 모두가 아르메니아의 문자체계로서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다. 1,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살아있는 유산인 아르메니아 알파벳과 아르메니아 문자예술은 아르메니아 정체성을 상징하며 아르메니아 언어 및 영적 문화를 보호하는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이유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대중은 높은 관심을 지속해왔다. 전세계에 퍼져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통합하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